고생 많았습니다.
올해 시험날도 추웠네요. 그래도 저번 주보다는 날이 풀린 듯하니 불행 중 다행이랄까요. 7년 전 그날 아침도 그랬습니다. 배급된 샤프심이 유독 잘 부러졌던 걸로 유명했던 해의 수능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기출문제집에서 한 번쯤 접한 적이 있으려나요.
시험 전날 밤 11시. 나는 기어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 옥상에 섰습니다. 밤바람을 맞고 싶었거든요. 2시간째 침대 위에서 뒤척거린 후였죠. 쉬이 잠들지 못할 거라는 걸 나는 그때 이미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잠을 충분히 자야 한다는 조언은 보름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허나 수험생이 일찍 잠드는 습관을 들이기란 쉽지 않죠. 자정이 가까워 집에 돌아오면 풀어야 할 문제집이 책상 도처에 산적해 있었으니까요. 잠을 줄이고 문제집을 푼다고 남보다 앞서 가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렇듯, 다들 간절할 테니까요. 앞서가기 위함이 아니라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나는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여러분들의 밤도 그러했을 겁니다.
당일 아침, 데려다주겠다는 어머니를 만류한 채 집을 나섰습니다. 기분 탓이었을까요. 거리는 유달리 고요했습니다. ‘오늘은 너의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다’. 무겁고 시린 아침 공기가 귓가를 맴돌며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그 장엄함에 위축되지 않으려 큰 한숨을 두어 번쯤 내쉬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응원 나온 담임 선생님이 오늘만 버티라며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그제야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실감 났습니다. 가까스로 버텨온 날들의 마지막.
시험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30초마다 샤프심이 부러졌고 교실은 최고온으로 올린 히터 때문에 후덥지근했다는 것, 새벽 4시부터 준비한 어머니의 5단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 울고 싶어 졌다는 것 정도입니다. 마지막 OMR 카드를 제출하고 밖으로 나오자 겨울바람이 과열된 이마를 식혀 주었습니다.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교문에 매달리듯 일렬로 선 학부모들이 보였습니다. 교회에서, 절에서 그리고 성당과 집에서, 간절한 만큼 안절부절못했을 두 손으로 부모들은 교문 철창을 붙든 채 서있었습니다. 멀리서 걸어오는 자식의 실루엣과 표정을 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학부모 무리 가운데서 나의 부모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옆에서 누군가 한숨 쉬듯 말했습니다.
“.... 끝났다....”
왈칵 눈물이 터졌습니다. 12년 전부터, 아니 어쩌면 19년 인생 전체의 목표였던 하루가 지나갔음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3일 내내 수학책을 붙들고 있다가 절망감에 구토했던 기억, 이 성적으로 넌 답이 없다는 담임 선생님에게 애써 담담한 척했던 기억이 스쳐갔습니다. 견뎌 온 나날을 추모하듯, 나는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뜨겁고 아팠던 청춘의 한 시절이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인근 고등학교를 지나다가 ‘얘들아 세상을 다 가져라!‘는 플래카드를 봤습니다. 해당 학교 수험생 학부모들이 붙인 것이더군요. 겨우 수능 한번 잘 친다고 세상살이가 만만해질 일은 없다는 건 어른들이 더 잘 알 텐데, 부모의 마음은 다 그런 걸까요. 내 자식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출발점에 서길 바라는 것. 아직 부모가 아닌 나로선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브런치에 “시험 잘 치십시오!”라며 응원을 남긴 바 있습니다. 한국 입시 제도에서 ‘시험을 잘 친다’는 말은 ‘비교우위에 선다’는 말로 치환됩니다. 내가 얼마나 후회 없이 시험에 임했느냐는 이 사회에서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닙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남보다 못했다면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내 행복의 기준이 내부가 아닌 외부에 위치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세계적 불경기가 불어닥치는 요즘이니 취업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과에 대해 여러분을 추궁하는 일도 누군가는 해야만 하겠죠.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 사도 바오로, 티모데오서
나 하나 정도는 여러분들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오래된 생각입니다. 십수 년간 여러분도 뼈저리게 느꼈겠죠. 한국에서 학생으로 살아남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동그라미로 가득한 친구의 시험지를 보며, 문득 삶은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들이 있었겠죠. ‘수능만 잘 치면 너 맘대로 살아라. 세상이 다 네 것이다'. 어른들의 설득과 강요에 못 이겨 현재의 행복을 수능 이후로 유예해 왔을 겁니다. 그게 현명하고 옳은 거라고 배웠으니까요. 때때로 삶은 사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고 되뇌면서 나와 여러분은 길기만 했던 하루를 인내했습니다. 시험 결과가 어쨌든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린 여러분은 모두 충분히 잘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면접이니 논술이니 오늘만은 잠시 접어두고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으면 합니다. 수능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는 까닭입니다. 달려온 길보다는 앞으로 달려야 할 길이 더 많습니다. 우리들의 분투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긴 싸움을 예비하는 자라면 과감히 휴식을 단행하는 것도 필요한 법입니다. 침대 위에서 들을 노래로는 ‘볼빨간 사춘기‘의 <나의 사춘기에게>가 좋겠네요.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달릴 길을 훌륭히 달린 당신.
* 표지 사진 출처 = 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