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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Jan 05. 2018

영화 <곡성> : 현혹되며 가는 게 인생일진저

출처 = 경향신문 칼럼, 힐레마허(ErnestHillemacher), 1843년 작품

 

 왜였을까. 왜 <곡성>이 끝난 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떠올랐을까.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다”는 신탁을 받은 후 평생을 도망쳐 다닌 남자다. 그는 이미 친부를 죽이고 친모와 자식을 낳아 놓고도 늘 멀리 떨어져 계신 양부모의 안위를 염려하며 살았다. 양부모를 친부모로 안 까닭이다. 양부가 자연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그는 신탁이 틀렸다며 안도한다. 그런 오이디푸스에게 신들은 근친살해의 죄를 물어 그의 백성들에게 역병을 내린다. 마침내 모든 진실을 알아차린 그는 어머니이자 아내의 황금 브로치로 자기 두 눈을 찌른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뒤틀어 놓고는 그 운명을 그대로 답습한 그에게 죗값을 물을 때, 신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장난이라면 참 고약한 장난이다.     




 “저어기 다리께 가게 실성했지라, 방앗간 황씨 급사했지라, 엊그제 용국이 그랬지라. 싹 다 그 일본 양반이 오고 나서 다 이 일들 아녀"

                                                                                                                                          - 영화 <곡성> 중


 시골은 운명 공동체다. 크고 작은 공동체야 도시에도 차고 넘친다. 그러나 워낙 다양한 계층과 출신들이 모여 사는 도시와 달리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란 시골 공동체의 결속은 질기고 단단하다.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시골 사람들은 함께 자라고 함께 병들어 죽으며 자신들만의 순리를 이룬다. 이 순리는 계절의 순환과도 같은 것이어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되어지는 것이다. 시골 사람들은 순환되는 순리 안에서 편안하다.     


출처= 영화 <곡성> 캡처

 

‘외지인(쿠니무라 준 분)’에 대한 곡성 주민들의 경계심 역시 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주민들은 최근 마을에 속출하는 사건(방화, 살인, 자살)의 원인을 설명해내려 애쓴다. 비극적 사건보다 인간이 견딜 수 없어하는 건 ‘이유 없는 비극‘ 뿐이기 때문이다.


 비극이 발생했다면 거기에는 합당한 원인이 존재해야만 한다. 정신병, 치정, 토지 문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좋다.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이유 없음의 공허감을 채우고자 하는 게 인간 본성이다. 주민들이 택한 설명은 ‘외지인의 등장’이다. 순리에 따르지 않는 외지인이 오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는 식의 무의식적 논증이다.     


 곡성 파출소 경관 종구(곽도원 분)는 외지인의 집에서 나온 딸 효진(김환희 분)의 실내화를 보고 눈이 뒤집힌다. 이유 없이 죽어나간 곡성 피해자들의 사진으로 도배된 외지인의 방방에서 나온 딸의 물건은 ‘외지인 원흉설’의 강력한 근거로 작동한다. 곡성에는 왜 왔냐는 다그침에도 침묵하는 외지인을 보며 종구의 의심은 확신이 된다. 뒤가 구린 놈이 무슨 말을 하겠어. 종구는 그리 믿었을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현혹되지 마쇼잉”
                                                                                   - 영화 <곡성> ‘일광‘의 대사 중     

 나홍진 감독은 효진의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과 기행에 대한 여러 가지 “현혹”을 제시한다. 무명(無名, 천우희 분)의 기묘한 여인은 외지인을 악귀로 지목하고 무속인 일광(황정민 분)은 그 여자야 말로 귀신이며 외지인은 그를 저지하려는 무당이라 강변한다. 뉴스에서는 환각을 일으키는 독버섯으로 음료를 유통한 무리들에 대한 특종 기사가 보도되고 있다. 동료 경찰관은 그 정도 독버섯으로 사람이 그렇게 되냐며 코웃음 친다. 같은 결과(효진의 병과 마을의 비극)를 설명하는 세 가지 상반된 가설들은 각자의 논리로 종구를 현혹한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촌각에 달린 딸의 목숨 앞에서 종구는 번민한다.          

    

의심하는 도마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 카라바조, 상수시 박물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

                                                                                                                                   - 누가복음 22장 34절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

                                                                                                                               - 요한복음 20장 25절 중     


 감독은 성경에서 ‘의심’에 관한 가장 유명한 두 가지 일화를 차용해 갈림길에 선 종구의 고뇌를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누가복음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이 견고함을 자부하나 예수는 너는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나를 부정할 것이라 예언한다. 무명의 여인은 자신의 논증의 증거로 ‘세 번 우는 닭’을 든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의심 많은 제자 도마에게 상처 자국에 손을 넣어보라 한다. 영화 후반에서 기어이 악마로 변한 외지인의 손바닥에는 부활한 예수의 증거인 못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다. 신의 아들의 손에 난 성흔이 악마의 손바닥에 새겨진 아이러니. 종구는 일광의 편에 섰으나, 결과적으로 악마의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현혹”이었다. 현혹의 끝자락에 선 자에겐 파멸이 기다린다는 서사의 오랜 공식대로 종구는 가족과 함께 파멸한다.     


출처 = 영화 <곡성> 스틸컷

  종구는 과오는 무엇인가. 현대 과학 대신 신적인 힘에 기댔다는 것인가. 그러나 의사마저 포기한 딸의 병을 두 손 놓고 좌시할 부모가 얼마나 될까. 부모 된 자라면 누구나 자식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한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무속 신앙의 힘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구해본다. 종구도 그리했다. 영화 마지막, 종구가 마지막 숨과 뱉은 “아빠가 다 해결할게”라는 대사 역시 이에 대한 증거가 된다. 종구의 죄는 자식들의 부모인 죄다.      


 선한 손길(무명의 여자)과 현혹(외지인)을 분간치 못한 무지 역시 종구에게는 혐의를 씌울 수 없어 보인다. 반쪽짜리 지성을 밑천삼아 한 생을 사는 것이 인간이다. 두 신적인 존재 중 도움과 현혹을 가려내기란 불가능하다. 양쪽 카드가 모두 동일한 확률을 지닐 때, 마지막 판돈을 건 도박꾼처럼 두 눈 질끈 감고 카드를 뒤집을 수 있을 뿐이다. 무지는 인간의 생이 내포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이 역시 종구에게 죄를 묻기는 어려워 보인다.     

    




“ 고놈은 낚시를 하는 거야. 뭐가 딸려 올진 몰랐겠지 지도. 고놈은 그냥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 딸내미는 고것을 확 물어분 것이여 ”
- 영화 <곡성> '일광' 대사 중


 오이디푸스와 종구의 차이는 하나다. 오이디푸스의 삶에선 단 하나의 신탁만이 작동한 반면, 종구는 상반된 두 개의 신탁 중 한쪽을 택해야 했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와 종구 모두 신(혹은 신적인 존재)들의 고약한 장난에 놀아난 비극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현혹 사이를 걸어간다. ‘10년 후를 계획하며 살아라 ‘와 ‘지금 현재만을 살아라’, ‘한 우물을 파라’와 ‘다방면의 지식을 갖춰라’, '인생 한방이다'와 '천릿길도 한걸음부터'... 인생과 삶에 대한 수많은 현혹들이 세이렌의 노래처럼 달콤하게 지저귄다. 삶의 크기에 비해 과학이 답할 수 있는 분야는 극히 일부일 것이므로, 더 합리적이라거나 더 옳은 선택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건 현혹일 것이고 어떤 건 잘한 선택이 되리라. 살아가되, 삶에 무지한 우리다. 두 눈 딱 감고 카드를 뒤집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그렇게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우리는 살 것이다. *




* 신형철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속 문장을 일부 변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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