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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Feb 13. 2018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엄마의 최선과 후회

콩을 심은 엄마와 팥으로 자란 아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사람들은 인과 관계를 좋아한다. 특정 변수(x)를 삽입했다면 필연적으로 y라는 결과값이 도출된다고 믿는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옛 속담이 그러하다. 콩(x)을 심었다면 콩이 나야지 팥(z)이 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팥을 볼 때는, 누군가가 팥을 심은 게 뻔하다고 미루어 짐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가 악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범죄, 특히 미성년자가 가해자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기자들은 가해자의 주변에서 ‘원인’을 찾는다. 가해자의 정신과 진료 사실을 폭로하고 가해자 부모의 주변인들을 찾아 인터뷰한다. 기자들이 사생활 침해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원인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명료하다. 대중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보편의 논리를 벗어난 악행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집요하게 원인을 캐묻는다. 어떻게든 설명해 내고, 이해하려 애쓴다. 원인을 알 수 없다면 안심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  

   

 십 대 가해자의 경우 학대하는 아버지, 아이들에게 냉정한 어머니 따위의 사연이 원인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부모의 학대와 무관심이 사건의 시발점이었다는 헤드라인을 보며 독자들은 분개하는 동시에 묘한 안도감에 젖어든다. 특수하되 명확한 원인을 하나 상정하는 순간, 이번 사건은 ‘그런 사람(가정)들’의 일로 분리되는 까닭이다. 나는 내 아이를 ‘그런’식으로 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세상의 모든 팥들은 팥이 심긴 결과인가. 그렇다면 콩을 심었으되 팥이 자라난 사례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자녀에게 최선을 다해 콩을 심는 부모들은 어디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아야 할까.       



출처= 구글 검색 / 콜럼바인 사건 당시 현장 화면


 1999년 4월 20일 11시 15분 무렵, 묵직한 더플백을 맨 남학생 두 명이 콜로라도주 콜럼바인 고등학교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이름은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 그들은 졸업을 앞둔 콜럼바인 고등학교 학생이었으며, 그들의 가방에는 사제 폭탄이 들어있었다. 잠시 후 딜런과 에릭은 900여 발의 실탄을 난사했고 이 결과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이 사망했다. 학살을 마친 두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책의 저자 수 클리볼드(이하 수)는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다.     


“ 왜 우리(수와 그녀의 남편)를 비난하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나라고 해도 그런 아이의 부모에 대해서는 끝없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내가 딜런의 부모가 아니었다면. ”
            -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93p     


 이 책의 원제는 ‘A Mother's Reckoning’다. 직역하자면 ‘어머니의 (불완전한) 추정’ 정도가 된다. 사건 발생 후 18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추정이 ‘불완전’함을 강조한다. 실제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어조는 명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딜런에 대한 변호와, 가해자의 최측근으로서의 준엄한 반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글을 쓸 때 기본 원칙 중 하나는 ‘일관된 논조’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설정했다면 주제와 관련이 없는 내용은 본문에서 배제하는 게 상식이다. 또한 한번 주제를 정했다면 ‘기-승-전-결’의 원칙에 따라 한 방향으로 결론을 지어야 한다. 음주 운전을 했으면 한 거고 안 한 거면 안 한 거지, 술은 마셨되 음주 운전이 아닐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이 ‘일관성 없는 글’이므로 가치가 떨어진다는 평가는 적절치 않다. 이 갈팡질팡함은 되려 저자의 정직성에 결정적 증거로 작동한다.     


이미지 출처 = 서울신문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이 될 가능성이 없다”

                                                                                                                              - 딜런 클리볼드의 일기 중     


“ 다른 사람 책상 위에 놓인 행복해 보이는 가족사진을 보면 의문이 솟았다. 나와 저 사람이 뭐가 달랐던 걸까? 그러면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변명하고 싶어 졌다. 딜련이 많은 사랑을 받았고 내가 좋은 엄마였다는 걸 알리고 싶은 절박함을 느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205p     


 딜런은 가해자이기 이전에 피해자였고 환자였다. 거칠고 몸집 큰 운동부 학생들은 소심한 딜런을 “호모”라며 조롱했고 육체적, 정신적 학대는 일상이었다. 딜런이 죽은 후, 그가 중증도 이상의 우울증과 알콜 의존 문제를 겪고 있었음이 전문가들에 의해 밝혀졌다. 그리고 그의 부모를 비롯한 어떤 누구도 이 사실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


 어떤 엄마인들 변명하고 싶지 않을까. 내 아들도 피해자라고. 오죽 서럽고 화가 났으면 그랬겠느냐고 아들을 변호하고 싶지 않았을까. 홀로 우울증과 사투하다 자살한 아들에게 보내는 가련함, 죄 없는 학생들을 살해한 범인의 부모로서 갖는 죄책감, 엄마가 아이에게 무관심했던 게 분명하다는 세상의 비난에 대한 억울함. 전혀 다른 세 가지 감정이 그녀의 가슴속에 엄존(儼存)했다. 양립 불가능한 감정의 극단을 정처 없이 오간 그녀의 18년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는 정직하게 담겨있다. 엄마이자 지각 있는 시민인 그녀로선 아들을 사이코패스 살인마로 단정 지을 수도, 딜런의 무죄를 강변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비정하고 잔인한 엄마였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기엔 그녀는 아들 딜런을 너무 사랑했다.    

 

수 클리볼드(좌)와 아들 딜런 클리볼드(우)의 사진

 최선을 다해 키운 아들이 미국 역사에 남을 살인마로 성장한 아이러니. 세상 사람들은 늘 그렇듯 사건의 '원인'을 밝히고자 분투했다. 수는 사건의 원인을 우울증이나 사이코패스 성향의 친구(에릭 해리스)에게서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수는 이 ‘원인’에 대해 침묵한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하나, ‘원인 불명’이다. '왜 딜런은 괴물이 되었나?'에 대한 원인은 불확실하고 복합적이되, 내 아들이 저지른 죄는 씻을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원인이 사라진 자리에는 결과만이 남았다. 자신은 아들을 키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과, 그 아이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 결과다. 콩과 팥에 대한 오래된 명제가 정면으로 부정당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 책은 어떤 의미로는 불쾌한 책이다. 성심성의껏 콩을 심던 무수한 부모들에게 설명될 수 없는 불안을 던져주는 까닭이다. 이 책 읽은 후부터는 그 누구도 콩 심은데 팥이 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다.


*실제로 이 책의 한국어판 번역자는 번역 도중 일을 놓고 뛰어가 학교에 있던 자녀를 부둥켜안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최선’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할 때의 최선은 개인의 역량 문제다. 내가 들일 수 있는 노고를 바닥까지 쏟아부은 상태, 혹은 그렇게 인정되는 상태를 두고 우리는 ‘최선’이라 말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전적으로 양육할 때의 최선에는 한 가지 의미가 추가된다. “내 아이를 위해선 ~~ 이 최선이야”라고 결정할 때의 최선은 단순한 역량의 문제를 넘어선다. 부모 자신으로선 각고의 고뇌 끝에 내놓은 결정이 결과적으로 자식에겐 최악의 선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부모들에게 불안을 자아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책은 부모의 ‘최선’이 자식의 미래에 있어선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불안을 일깨운다.     


 “누군가를 전적으로 양육할 때”라는 문장을 타이핑하면서 이에 해당되는 관계가 무엇이 있나 가늠해 보았다. 다소 예외적인 몇 가지 경우가 스쳐갔으나 한 생명의 전 존재를 오롯이 떠안는 관계는 역시 부모뿐이었다. 아직 가정을 꾸리지 않은 나로선 이 책을 다소 학문적 흥미의 측면에서 받아들인 게 사실이다.      


  이 책을 완독 하신 어머니는 책을 돌려주시며 “읽는 내내 불안하더라”라고 하셨다. 우리 두 남매를 양육할 때 결정한 당신의 ‘최선들’을 어머니는 하나씩 의심하는 듯 보였다. 한 생을 두 번 살 수 없는 인간이다. 그때 그 선택이 아이들에게 최선이었는지 어떻게 저울질해볼 수 있을까. 엄마가 최선이었면 된 거지, 마음 쓰지 마셔라 다독여도 어머니의 미간은 쉬이 펴지지 못했다. 나의 선택이 내 자식에겐 최선이 아니면 어쩌지? 부모들이란 평생 자식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구나. 복잡해 보이는 당신의 눈을 보며 나는 알았다.       

 

 딜런 클리볼드를 포함해, 콜럼바인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의 안식을 기원한다. 동시에 이 책의 서문 제목처럼,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애쓰는” 모든 부모들에게 삼가 존경과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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