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언 Jan 28. 2018

『나쁜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의 자격

핵심은 평등이다

    

“ 니가 무슨 페미니즘?”      


 친구의 말에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내가 평범한 한국 20대 남성이라는 점을 알았을 뿐이다. 이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가시적, 비가시적 차별과 편견에 대해 친구는 열정적으로 토로했다. 남자인 너는 이 숱한 편견들에게서 자유롭냐는 다그침이었다. 애인에게 줄 선물 포장지를 고를 때 가장 먼저 핑크색에 눈이 가는 나였으므로 나는 입을 닫았다. 그가 묘사하는 페미니즘은 너무 지고하고 복잡해서, 성차별 최전방에 선 투사들이 암송하는 계율처럼 보였다. 외부인은 접근조차 불허하는 무언가.


 그 후 약 1년 만에 다시 페미니즘 책을 구입했다. 제목은 『나쁜 페미니스트』. 그 사이 몇몇 여성들은 묻지마 범죄의 희생양이 됐고, 여전히 남녀공용 화장실을 두려워했다. 나보다 3살이 어린 여자 후배는 “여성 지원자치곤 나이가 많네요”라는 면접관에게 말을 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여성도, 기업 인사 담당자도 아닌 내가 이거 하나 읽는다고 뭐가 달라지려나 싶은 회의가 피어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니체의 말대로,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으니까.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나는 저 높고 위대한 페미니스트 왕좌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은 완벽한 인간 같은 포즈를 취해야 한다. (중략) 문제는 나는 허구한 날 실수하고 넘어지고 대차게 말아먹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14p   

  

 오늘날 페미니즘은 현 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비판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용어가 되었다. 현 대통령까지도 후보 시절 “나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 천명한 바 있다.   

  

 여성 학자가 아닌 대중에 있어서의 페미니즘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그 누구도 ‘페미니즘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속 시원히 정의 내리지 못한다는 것, 둘째는 모두가 페미니즘을 거론하지만,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의하기 꺼려한다는 것이다.      


 먼저, 페미니즘이란 무엇이라 명쾌하게 정의하기 힘든 이유는 뭘까? 나는 페미니즘 담론의 복잡성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담론이 복잡성을 띤다는 건, 그만큼 사회(혹은 구성원들이)가 복잡하고 교묘하게 특정 계층을 억압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여자는 멍청하고 감정적이야”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해서 성차별적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진짜 편견과 차별은 은밀하게 작동하기 마련인 까닭이다. 수많은 선입견에 일일이 대응하자니 복잡해지는 건 불가피했을 것이다.     


 둘째, 누군가가 자신을 페미니스로 정의하려면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페미니즘적'이어야만 한다. 록산 게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려는 자에게 사람들은 “높고 위대한 (그리고 완벽한)” 인격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는 불합리하다’면서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한다고 가정해 보자. 헌데 하필 이 사람의 애청곡 리스트에 프로듀스 101의 <Pick me>가 있다면? (해당 노래에 대해 한 언론사는 ‘여성이 남성의 간택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인 것처럼 묘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겉과 속이 다른 무늬만 페미니스트라 매도당하기 쉽다는 록산 게이의 견해다. 임금 격차에 대한 자각은 갖췄으나 성차별적 편견에 대한 깨달음은 갖추지 못한 까닭이다. 이미 우리 생활과 사상 곳곳에 침투한 성차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얼마나 될까. 결국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기란 점점 어려워지고 페미니즘은 고립돼 간다.

    

출처 = 록산 게이, TED 강연 캡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핑크색이다. 쿨해 보이기 위해서 블랙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닌 적도 있었으나 사실 핑크, 모든 색감의 핑크를 좋아한다. (중략) 여성의 미모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준을 비판하려면 매끈매끈한 종아리에 대한 나의 이 비밀스러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372p     


 록산 게이와 『나쁜 페미니스트』의 탁월함은 페미니즘(혹은 페미니스트)이 종종 부닥치는 자기모순성에 대해 파고든다는 점이다. 그녀는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인간임과 동시에 핑크색을 좋아하고 제모를 마친 자신의 매끈한 종아리를 사랑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히기란 쉽지 않다. “핑크색”은 여자들에겐 이런 색이 어울린다 남성들이 멋대로 믿고 있는 편견의 상징이고, “매끈한 종아리”는 털이 없는 여자의 다리 가치 있다는 여성 상품화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무릇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라면 이 모든 편견으로부터 작별해야 한다. 록산 게이가 자신을 “나쁜(불완전한)” 페미니스트라 밝히는 이유다.   


  

출처 = 록산 게이, TED 강연 캡처


 핑크색 공주 드레스와 매끈한 종아리를 사랑하는 그가 여전히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의 근거는 간결하지만 강력하다. 록산 게이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개똥 같은 취급”(작가 수su)을 당해선 안 된다고 믿는다. 그게 전부다. 여성도 인권과 지성을 지닌 한 인간이며,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은 평등해야 한다. 이 간단한 사실에 동의하는 누구든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그는 선언하고 있다. 비록 “나쁜” 페미니스트에 그치겠지만, 그게 어딘가.


중요한 건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며, 성별을 이유로 차별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너는 너가 페미니스트 같니?”     


 이 글을 쓰면서 1년 전 친구가 던졌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이 질문을 지금 다시 받는 다면 내 대답은 어떨까.      


 친구가 말하는 “페미니스트”는 모든 차별과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탈인간을 칭하는 것이므로, 여전히 나의 답은 “아니다”가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기엔 내가 지닌 편견의 목록이 너무 두텁다. 장대한 편견들과 완전히 손 씻는 날이 오기란 불가능하거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성(the opposite sex)을 적으로 돌리며 까내리는 게 페미니스트라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은 지금 한 문장을 뒤에 덧붙일 것이다.     


 “아니, 나는 그냥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 같은 취급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믿는 인간일 뿐이야”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고치는 의사,살리는 의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