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니에서 아침을』:밀 탕드레스,기꺼이 헤매는 당신께

by 시언


<바람 부는 날> /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 유화 / 맨체스터 대학교
“우리 모두는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뿌리내리고 성장할 수 있는 그 고요하고 작은 공간을.”

- 마크 로스코(1903.9.25.~1970.2.25)


흔히 인생은 항해에 비유되곤 합니다. 이 비유의 역사는 생각보다 깊습니다. 학자들은 그 기원을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오디세이아』에서 찾습니다. 신의 저주로 10년 동안 바다 위를 표류하는 오디세우스와, 그런 아버지를 찾기 위해 아들 텔레마코스가 항해를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명료한 목적(고향에 돌아간다/아버지를 찾는다)을 지녔지만 항해는 녹록치 않습니다. 신의 분노로 깨어난 풍랑과 온갖 괴물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까닭입니다. 갈망하는 목표를 위해 항해에 나선다는 점과 항로 위에서 뜻밖의 시련에 부닥친다는 점, 땀내 나는 부침 가운데에서 성장해 간다는 점에 근거해 볼 때 인생은 항해와 닮아 있다는 비유는 타당해 보입니다.


헌데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의 항해는 고대 그리스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혹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을 아시나요? 1953년에 발표된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주인공이 ‘고도’라는 이름의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내용의 전부입니다. 고도의 정체는 작품 말미에까지 밝혀지지 않는데, 작가 베케트는 “고도가 누군지 알았다면 작품에 썼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인생이 항해라던 아까의 비유를 빌려오자면 현대인들의 항해는 선장조차 그 목적지를 모른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오디세이아』 속 항해와 현대인의 항해 사이의 차이가 발견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항해는 분명한 목적지가 먼저 있고 항해에 나서는 건 그 다음입니다. 반면 현대인들의 항해는 그 목적지가 누구, 혹은 어디인지 본인조차 알지 못합니다. 다만 행복하고 싶을 뿐, 그 행복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죠.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태어났으므로 살아가지만 내가 가닿고자 하는 안식처는 어디인지에 대해 당사자가 가장 무지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처럼 표류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가는 현대 소설 캐릭터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인공 홀리 골라이틀리입니다.


출처 =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스틸컷
“뭐? 니가 원하는 게 망할 뭔데? 그랬더니 홀리가 이럽디다. 그게 뭔지 발견하게 되면 가장 먼저 알려 줄게요.”
- 트루먼 커포티, 『티파니에서 아침을』 47p


당돌한 플레이걸 홀리는 ‘농경 도시의 유목민’ 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농경민은 안주(安住)함을 생활의 기본 골조로 합니다. 작물이 잘 자라기 위해선 농사꾼의 지속적인 살핌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된 밭일을 서로 거들기 위해 촌락이나 도시를 이루는 것이 보통입니다. 안정된 삶이죠.


그러나 유목민은 다릅니다. 가축들이 초원의 풀을 전부 먹어치우면 미련 없이 떠납니다. 곧장 떠나야 하니 그들의 짐가방은 언제나 간소합니다. 농경민들의 촌락에서 중시되는 이른바 ‘도덕’도 유목민들에겐 별 가치가 없습니다. 깃털 같이 내려앉았다가 바람 불면 떠나는 삶. 홀리의 우편함에 “홀리 골라이틀리, 여행 중”이라 써 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녀는 떠나야 사는 인간입니다.


동시에 홀리는 속물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 소설이 발표됐을 홀리가 콜걸(Call girl)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이 일었다고 하니까요. 홀리는 “화장을 고치러 갈 때”마다 남자들에게 50달러를 받는 여자이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여성입니다. 매일같이 파티에 출석하고, 돈 많은 갑부들을 유혹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홀리를 두고 수군대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개의치 않습니다. 떠돌며 유목하는 자에게 농경의 도덕은 무의미하니까요.


“하지만 끔찍한 건 말이죠, 실은 나는 아직도 똑같아요. 나는 여전히 칠면조 알이나 훔치고 들장미 덤불 속을 헤치며 달리고 있어. 다만 지금은 그걸 ‘심술궂은 빨강이 있다’로 부를 뿐이지.”

- 트루먼 커포티, 『티파니에서 아침을』 103p


여기서 흥미로운 건 홀리의 인생 항로가 그리 행복하거나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짐짓 자유에 몸을 맡기고 쾌락에 심취한 체 하지만 파티가 끝난 후 그녀의 일상은 공허합니다. 손님이 떠난 방안에 웅크리고 있으면 배 곯은 고아에 불과했던 과거가 그녀를 엄습해 옵니다. 홀리는 그 순간을 "빨강이 온다"고 불렀습니다. 멀리 떠나면 달라질 거라고, 어린 홀리는 간절히 믿었고 또 실제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심술궂은 빨강"은 그녀를 놓아줄 기미가 없어 보입니다. 핏빛 빨강이 시야를 물들일 때마다 홀리는 티파니 보석상으로 쫓기듯 달려갑니다. 매끈한 정장 차림의 점원들과 정렬된 보석들을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언젠간 갑부의 아내가 되어 기품 있게 다이아를 고르는 자신을 꿈꿨을 겁니다. 안주하길 원하는 유목민이랄까요. 그러나 한번 들러붙은 역마살과 작별하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결국 이 도시도 그녀가 뿌리 내릴 곳은 아니었고 그녀는 다시 한번 미지의 나라 브라질로 떠납니다. 부디 다음은 종착역이기를 바라면서요.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방황이 노력의 증거가 된다면 홀리 골라이틀리의 노력은 그 누구보다 치열해 보입니다. 그건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겠죠. 지금은 방황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는 내 자리를 찾아 길었던 항해를 마치리라 자신에게 다짐합니다. 대학에만 들어가면, 이 회사에만 들어가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만 하면... 무수한 희망을 부여잡고 흔들리는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을 겁니다. 하지만 웬걸, 고대하던 그 자리에 도달해 우리가 확인하는 건 여기도 종착역이 아니라는 사실 뿐입니다. 비감해하는 가슴을 추스르며 우리는 다음 항해에 나설 준비를 합니다. 유난히 흔들렸던 날이면 티파니로 달려가거나 고급 외제차 매장 밖을 기웃거리기도 하겠지만, 뭐 어떻습니까. 다음 항해에 나설 의지를 날카롭게 벼릴수만 있다면요.

“봄에 엽서 한 장이 도착했다. 연필로 흘려 쓴 엽서에는 서명 대신 립스틱 키스 자국이 있었다. “브라질은 짐승같이 흉악한 곳이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정말 좋아요. 티파니 같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해. 정말 근사한 세뇨르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어요. 사랑? 그런 것 같아. 어쨌든 살 곳을 찾고 있긴 해요. (중략) 주소 보낼게요, 내가 살 곳을 알게 되면. 밀 탕드레스('애정을 담아'라는 뜻의 프랑스어).”“

- 『티파니에서 아침을』, 156p


다음 여행지는 홀리에게 끝 모를 항해에 마침표를 찍을 그곳이 되어줄까요? 소설 마지막에서 작품 속 화자는 그렇게 자문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화자와 독자 그 누구도 답할 수 없습니다. 인생이 그러하듯, 『티파니에서 아침을』 역시 열린 결말로 끝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뿌리내릴 자리를 찾는 여정을 홀리가 멈추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견고하게 뿌리 내려서, “티파니에서의 아침” 같은 건 필요 없어지는 날을 언제까지고 그녀는 찾아 헤맬 것입니다. 서명 대신 립스팁 자국이 찍힌 편지가 주소와 함께 오는 날, 편지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하지 않을까요?


밀 탕드레스, 기꺼이 방황하는 당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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