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관하여
# 종교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포함돼 있을 수 있으니, 원치 않는 분은 읽지 않는 걸 권해 드립니다.
칼 포퍼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나요? 포퍼는 사회와 과학에 대해 연구한 영국의 철학자입니다. 인문학을 전공한 분이 아니라고 해도, 권장 도서 목록에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란 책을 한번쯤은 들어보셨겠죠. 과학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과학과 비과학을 가르는 기준을 정의한 바 있습니다. ‘반증 가능성이 있는 것만이 과학이다’는 것이죠.
말이 좀 어렵나요? 예를 들어보죠. ‘세상의 모든 백조는 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다른 누군가가 호주에 분포하는 검은 백조를 가져와 자신있게 반론합니다. ‘아니? 여기 검은 백조도 있잖아’. 이때 ‘모든 백조는 희다’는 주장은 과학적입니다. 왜냐하면 합리성과 여러 증거를 통해 반박할 수 있고, 또 수정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해태의 뿔은 네 개다’라는 주장을 볼까요? 해태는 중국 요순 시대에 살았다고 알려진 상상의 동물입니다. 누구도 해태의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없죠. 정말 뿔이 몇 개인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반박도, 검증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해태의 뿔에 관한 주장은 과학이 아닌 미신에 가깝습니다. 과학이 아닌 이 주장은 검증의 문제가 아닌,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는 믿음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 반박 가능성을 길잡이 삼아 오늘 얘기할 영화인 <맨 프럼 어스>를 살펴보도록 하죠.
여기 존이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종신 교수직을 명확한 해명도 없이 거절했습니다. 그리곤 조용히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합니다. 10년간 함께 교단에 섰던 교수들은 급히 떠나려는 존을 붙잡아 간소한 환송식을 엽니다. 의자와 소파 몇 개만 덩그러니 놓인 존의 집에서 존은 동료 교수들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자신의 나이가 14,000살이 넘었으며, 불로불사를 들키고 싶지 않기에 10년마다 사는 장소와 신분을 바꾼다는 것이죠.
본인을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존은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인류 구분에 기초했을 때 자신은 크로마뇽인에 속하는 인간이며, 다만 ‘죽지 않는다’는 특성만 다르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친구 중 누군가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이런 말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상상이 되시나요? 동료 교수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은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근거를 대기 시작합니다.
“그래? 그럼 그 당시 지형은 어땠나?”
“산악이었어. 서쪽은 평원이었고. 지금의 프랑스 해변에서 영국이 보였어. 거대한 산맥이 깊은 계곡 맞은편에 펼쳐져 있었어. 당시에는 해수면이 오르기 전이라 대륙의 일부였으니까.”
문제는 존의 진술들이 꽤나 신빙성 있다는 것입니다. 디테일이 살아 있달까요. 전문가인 동료 교수들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요. 위의 진술 역시 홍적세 말기에 대한 지정학적 조건에 정확히 부합합니다. 동료 교수들과 영화를 보는 우리에겐 존에 대한 두 가지 가능성이 남습니다. 그가 인류학 지식에 정통한 사기꾼이거나, 혹은 정말 14,000년을 살아 왔거나요. 동료들은 전자에 모든 가능성을 걸고 계속 그를 검증합니다. 사실 지구과학 교과서와 충분한 상상력만 있다면 존 정도의 진술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요. 존은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이 성경 속 예수라고까지 합니다.
“부처를 만난 그(나)는 부처의 가르침이 좋았어요. 돌아가며 500년 간 그는 생각했죠. 부처의 가르침을 (유럽에도) 전하면 어떨까. 그래서, 그렇게 한 거죠. 오늘에 와선 부풀려진 게 많지만요.”
- 영화 <맨 프럼 어스> 中
당연히 비과학적인 주장입니다. 차라리 해태 뿔이 4개라는 주장이 과학적이어 보일 지경이죠. 그러나 인도의 고행자들에게 통증 경감술을 배워 십자가 위에서도 죽은 척할 수 있었다는 존의 진술과, 카톨릭의 교리 중 상당 부분이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하다는 사실의 설득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느 쪽이 진리인가. 이제 거실에 둘러앉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관객인 우리는 혼란스러워 집니다. 감독은 이따위 허구를 믿으라고 영화에 집어넣은 건가. 하지만 존의 말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린 이미 보라색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전 세계 히어로들이 막아낸다는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고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존의 말이 과학과 종교에 대한 색다른 통찰을 준다는 점입니다.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던 천동설도 당시에는 수많은 이론으로 검증받은 과학적 주장이었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는 대하소설 정도로 읽히는 그리스 신화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진지하게 믿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기소 사유에 ‘도시가 믿는 신을 믿지 않은 죄’가 명시된 건 유명한 일화죠. 그토록 맹위를 떨치던 당대의 진리를 오늘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건 틀렸으니까요. 우리에겐 21세기의 자명한 과학적 진리와 현대 종교가 있지 않습니까?
그럼 1,000년 후 우리 후손들은 우리가 읽던 과학 서적과 교리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지금의 우리처럼 외경심과 지적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볼까요? 아니면 “옛날 사람들은 이런 걸 진짜로 믿었다니”라며 신기해할까요? 여기서 존의 “헛소리”를 듣고 반론하느라 쩔쩔매는 동료들의 직업을 교수와 크리스천으로 설정한 감독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시간의 풍화 앞에서 과학과 종교는 평등하다는 것, 만고불변하며 보편타당한 진리는 과학과 종교 어느 쪽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존, 자네의 말은 도무지 우리 상식에 들어맞지 않네.”
- 영화 <맨 프럼 어스> 中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과 종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과학은 언젠가 반증될 일시적 주장에 불과하고, 종교는 애초에 검증의 대상이 아니니 모든 게 부질없다는 회의론을 지지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현대의 과학적 진보는 과거 과학자들의 반증된 주장, 즉 오류로 밝혀진 이론을 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헤겔의 정반합의 과학 버전이랄까요. 정(正)이 없다면 반(反)과 합(合)도 존재할 수 없음은 자명해 보입니다. 오류로 밝혀질 주장이라 해서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 내에서 종교는 인간이 나아가야 할 윤리적 방향성을 제시하는 순기능을 발휘해 왔습니다. 또한 해독 불가능한 문자를 사용했던 우리 조상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들 중 상당수는 그들이 믿었던 종교에 대한 연구에서 왔습니다. 돌을 금으로 만들겠다는 연금술사들의 노력이 근대 화학의 기틀을 마련했듯, 언젠가 반증될 오늘의 과학과 종교도 역사의 유구한 흐름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오늘의 종교와 과학을 있는 힘껏 진보시켜 나가는 것뿐이죠.
모든 책과 영화에서 교훈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영화 <맨 프럼 어스>가 주는 교훈을 굳이 꼽자면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존과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도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와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각 분야 석학인 동료 교수들도 존의 “헛소리”를 논파하기는커녕, 나중에는 사실상 현혹된 모습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존의 헛소리를 즐기다가 나중에 가서는 필요 이상으로 불쾌해 하는 모습이 그 증거죠. 존이 만약 악한 의도를 숨긴 사기꾼이나 정치인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는 히틀러를 포함한 여러 폭군들이 대중과 전문가들의 지지 아래 집권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럴 듯한 근거를 갖췄다 해도 주장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기를 우리는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반대로 비과학적이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주장이라 해서 반드시 진실이 아니라는 법도 없습니다. 천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는 화형 위기에 처했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외친 목수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뒀죠. 전자는 현대 우주론의 1번 상식이 됐고 후자는 전 지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유력 종교의 주춧돌이 됐습니다. 오늘날 “상식”으로 불리는 것들의 대부분은 박해의 가시밭길을 걸어왔음을 잊어선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 쉽게 “헛소리”로 분류하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는 재고해야 봐야 합니다.
영화 마지막에서 동료 교수들은 존의 말을 부인한 채 자리를 뜹니다. 물론 존의 주장이 논파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주장은 과학이 아니므로 입증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동료들 중 샌디만이 떠나는 존의 차에 올라탑니다. 믿음 하나로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는 자에게 헌신한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과 닮아있죠. 둘의 여정은 어떻게 끝날까요? 중증 정신병 환자와 그를 따른 광신도의 말로일까요? 저도, 여러분도 답할 수 없습니다. 진리에 관한한, 답은 시간만이 알고 있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