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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Apr 19. 2018

영화 <소공녀> : 좋겠네요. 어른이셔서.

불행한 어른, 행복한 철부지.

  

물건의 소유 방식이 삶의 가치관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무엇을 갖고 있느냐’는 어떻게 사느냐와 같다.
- 곤도 마리에,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中      

 

 나를 비롯해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정주민(定住民) 일 것이다. 몸을 뉘일 집을 마련하고 몸을 덥힐 옷가지와 식재료들로 그 집을 채워 나간다. 초등학교 때부터 생활의 3 요소로 교육받아 온 ‘의식주(衣食住)’다. 하나라도 없거나 모자라면 생활은 쓰러지기 직전의 팽이처럼 위태로워진다고, 우리는 그리 배웠다. 그러니 행여 모자라거나 좁을 일이 없도록 부단히 채우고 넓혀가는 것이 정주민의 덕목이다. 정주민의 사회에서 ‘어른’은 이 의식주를 홀로 지탱해가는 사람을 칭한다. 저 나이에 집도 절도 없이 떠돈다며 혀를 차던 어르신들의 험담을 우리는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다.  

    

 헌데 왜일까. 의식주를 부족함 없이 갖춘 이 사회의 ‘어른’들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출처 = 영화 <소공녀> 스틸컷


 3년 차 가정 도우미 미소(이솜 분)는 하루 지출 내역을 노려보는 중이다. 지출 내역이라고 해봐야 식비와 약값, 한 잔의 위스키값, 담배값 그리고 월세가 전부다. 집주인과 정부는 월세와 담배값 인상을 선언했고, 하루에 45,000원인 일급은 우직하게 초심을 지키고 있으니 뭔가를 줄이긴 줄여야 한다.      


 ‘정상적’인 어른이라면 기호품인 위스키나 담배값을 삭감할 것이다. 기호품을 포기한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집세나 식비를 충당해야만 사람 구실 하는 거라고 누구나 입버릇처럼 강조하지 않던가. 약을 끊는 순간 귀신처럼 백발이 돼버릴 테니 약을 끊을 수도 없다. 담배와 위스키가 없는 자신의 삶을 상상하듯 미소는 잠시 미간을 찌푸린다. 조금 덜 웃고 조금 더 불행해지겠지만, 뭐 그게 대순가.      


다음 날 미소는 집주인에게 밀린 월세금을 내밀며 말한다.     

   

“저 방 뺄게요”     


출처 = 영화 <소공녀> 스틸컷


 거대한 캐리어와 옷가방을 끌고 집을 나서는 미소의 손에는 옛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리스트가 들려있다. 리스트의 이름은 ‘The cruise’. 자신의 “여행” 동안 묵을 여객선들의 목록이라는 뜻이다. 밴드에서 음악과 위스키, 담배로 청춘을 함께 불태운 친구들이라면 다만 하루라도 자신을 재워주지 않을까. 미소는 희망했을 것이다.


 영화 <소공녀>는 미소가 친구들의 집을 돌며 겪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미소의 친구들은 의식주를 고루 갖춘 이 사회의 어른들이다. 반면 미소는 제 몸 누일 곳 하나 없는 주제에 쥐꼬리만 한 일당을 위스키와 담배에 쏟아붓는 하루살이 인생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많은 ‘어른’들 사이에서 안식을 찾은 건 미소 한명뿐이다.     


“못 벗어나. 집이 아니라 감옥이야. 이 집 한 달 대출 이자가 얼만 줄 알아? 100만 원이야. 20년 동안 내야 이 집이 내 것이 돼. 근데 그때는 아파트가 많이 낡겠지?”   

         

 번듯한 아파트에 살지만 이혼 후 대출금 상환에 허덕이는 대용(이성욱 분), 재벌가의 며느리가 됐지만 남편의 식사 시중을 들며 사는 정미(김재화 분), 유수의 대기업에서 일하지만 점심때마다 포도당 링거를 맞는 문영(강진아 분)까지.  미소를 맞이할 때 짓던 그들의 동정 섞인 웃음은 점차 부러움과 질투의 냉소로 변해간다. 사회 전체로부터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으리라. 언제쯤 행복이 오시려나. 의식주를 온당히 갖춘 채 간신히 견디며 기다렸건만 정작 행복은 철없는 옛 친구의 입가에 깃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출처 = 영화 <소공녀> 스틸컷
“ 난 너(안재홍 분)랑 이렇게 놀고, 담배만 필 수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     


 욕망은 중요한 문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해 무지하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멘토들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인 양 착각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번듯한 집과 직장, 좋은 집안의 사위(며느리) 같은 욕망이 대표적인 예다. 수십 년간 있는 힘을 다해 타인의 욕망을 추구하던 아이들은 어느 한적한 새벽 길거리에서 문득 깨닫고 마는 것이다.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닌데’라고. 자신의 것도 아닌 욕망을 충족하느라 행복을 저당 잡힌 미소의 친구들에게, 자신의 욕망(담배, 위스키, 남자친구)을 정확히 알고 추구하는 미소는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사람 같이 사는 게 뭔데요?”


  이와 같은 시기와 질투는 “넌 염치가 없다”는 정미의 대사로 집약된다. 미소는 정말 염치가 없는 인물인가. 미소는 하룻밤 재워줄 수 있냐고 친구들에게 언제나 정중히 양해를 구했고, 상대가 거절하면 재차 조르지 않았다. 머물던 중 친구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 그 즉시 집을 나왔다. 물론 나올 땐 감사의 손편지와 작은 선물(집청소, 요리 등)을 잊지 않았다. 45,000원짜리 지출 내역서에서 ‘세금 5,000원’ 항목은 빠진 적이 없었다. 요컨대 미소는 제 힘으로 삶을 꾸려가는 또 한 명의 ‘어른’인 것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자기가 번 돈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에 돈을 쓰는 성인을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출처 = 영화 <소공녀> 스틸컷


 영화의 종반부, “미소 걔 여전히 웃을 때 예쁘더라”는 친구들의 내레이션과 함께 백발 여인의 옆모습이 버스 창가로 스쳐간다. 미소다. 꼬박꼬박 약을 먹던 미소가 백발이 됐다는 건 약 먹기를 중단했다는 뜻이다. 왜였을까. 단골 위스키바의 가격이 인상됐을 수도 있겠고, 새로 구한 가사 도우미 급여가 전보다 낮아서 일 수도 있겠다. 미소는 약값을 포기함으로써 ‘흰머리가 되지 않는 것’을 기회비용으로 지불한 것이다. 그녀가 집을 포기했을 때 그러했듯이.     


 미소는 여전히 행복해 지기를 포기하지 않았구나. 쨍한 햇살 아래 휘날리는 미소의 백발을 보며 나는 조금은 안도했다. 24시간 세탁방 소파에서 잠을 자더라도, 한 많은 귀신마냥 백발이 되더라도,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그녀는 꽉 붙들고 놓지 않을 것이라는 감독의 비유였다.     


 영화관을 나서자 찬바람이 상기된 이마를 식혀주었다. ‘이것만 있으면 딴 건 아무것도 필요 없’을 무언가가 내게도 있는지 헤아려 보았다. 책, 가족, 사랑, 순댓국에 차가운 소주 한 병 곁들일 수 있을 만큼의 여유... 몇 가지가 떠올랐으나 그게 타인의 것이 아닌 나만의 욕망인지, 정말 그것만 있으면 살아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었다. 부단히 찾으면 언젠가 찾아지겠지. 중요한 건 진짜 내 욕망을 찾았을 때, 집을 포기해서라도 행복해지겠다는 용기가 아닐까. 선택에 기로 놓일 어느 날, 방을 빼겠다 선언하는 미소의 얼굴을 기억하길 바라며 나는 옷깃을 여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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