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언 Jul 04. 2018

영화 <변산> : 뭘 얘기하고 싶은진 알겠어요, 근데.

출처 = 영화 <변산> 포스터

 기대가 많았던 영화였다. 박정민의 다재다능함과 김고은의 단단함, 무엇보다 이준익이라는 이름을 믿었다. 게다가 힙합을 소재로 한 영화라니. 한국의 <8마일>이 탄생하는 게 아닐까 고대하며 나는 영화관에 드러섰다.   

  

 <사도>와 <동주>의 열성팬인 내게 이준익은 ‘무거운 걸 묵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감독이었다. 무거운 이야기를 다룰 때 그는 억지웃음을 자아내지도, 큰일이라도 난 듯 결연해지지도 않는다. 내면에서 정립된 하나의 서사를 찬찬히 풀어낼 뿐인데, 영화관을 나서면 묵직한 울림이 가슴벽을 둥둥 울린다. 이준익 ‘청춘 3부작’의 마침표인 <변산>에 기대가 컸던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역시나, 너무 큰 기대는 실패의 확률을 높인다는 인생의 원칙을 나는 다시 한 번 깊게 새겼다.   



  

출처 = 영화 <변산> 스틸컷
"고향이라고 해준 건 X도 없으면서 정말, 발목은 X나게 붙잡네 정말! ”
- 영화 <변산> 중     


 랩 경쟁 프로그램 <쇼 미더 머니> 장수생인 학수(박정민 분, a.k.a 심뻑)는 폼나게 살고 싶다. 래퍼들은 후진 걸 싫어하니까. 하지만 다짐은 부재를 증명한다. ‘차카게 살자’는 문신이 착함의 부재를 증명하듯, 멋지게 살자는 다짐은 그의 현실이 전혀 멋지지 않다는 걸 반증한다.     


 학수는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향한다.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건달 아버지를 만난 학수는 분통을 터뜨린다. 그러나 소매치기 현상수배범으로 의심 받으면서 학수는 상처와 흑역사만 가득한 고향에 붙들린다. 영화 <변산>은 지긋지긋한 고향에 붙들린 학수와 학교 동창들이 엮어내는 한 편의 청춘 활극이다. 최소한 연출 의도는 그런 것으로 보인다. 주제가 훌륭한 것과 그것을 잘 표현했느냐는 별개의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출처 = 영화 <변산> 스틸컷
“  값나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는 살지 말어 ”
- 영화 <변산> 중     


 <변산>의 핵심 대사가 영화 <베테랑>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라는 대사가 묘하게 오버랩 되는 건 나뿐인지 모르겠다. 사실 대사가 비슷하다고 해서 예술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중요한 건, 핵심 대사가 영화 전체의 서사를 얼마나 예리하게 관통하느냐 하는 것이다.      


 학수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발작처럼 분노를 표출하고, 툭하면 서울로 돌아갈 궁리를 한다. 당연하다. 너무 싫으니까. 바람난 건달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신을 버렸다. 온 동네가 훤한 시골인 변산에서 학수는 ‘애비 없는 자식’으로 통했을 것이다. 누군들 떠나고 싶지 않겠나. 그러나 선미(김고은 분)는 학수의 행위가 회피적이라 못 박은 후, 값나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는 살지 말라 훈계한다. 이 말이 효과적이려면 ‘서울에서의 성공’ 하나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퉁’치려는 학수의 회피 심리가 더 자세히 드러났어야 한다. 그러나 스토리는 파편화 돼있고, 무수한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데 실패했다.     

 

출처 = 영화 <변산> 스틸컷


 일례로 영화 마지막에 학수는 갯벌에서 동네 건달 용대(고준 분)와 격렬히 싸운다. 용대는 학창 시절 때 학수의 ‘꼬봉’이었다. 조직폭력배로 변모한 용대 앞에서 당혹스러워 하는 학수의 모습은 확실히 코믹하다. 헌데 학수와 용대의 결투가 서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몹시 불분명하다. 변산은 갯벌로 상징되는 장소이고, 그 갯벌에서 뻘을 뒤집어쓰며 싸운다는 건 더 이상 학수가 고향으로 상징되는 트라우마에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헌데 그게 왜 하필 용대와의 싸움을 통해 표현돼야 하는가? 상하 관계가 역전된 옛 꼬봉과의 결투가 학수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웃음말고 어떤 의미를 주는가? 아버지로 시작된 트라우마의 극복이라면 차라리 아버지와 치고 받다가 속시원히 오열하는 쪽이 낫지 않나? 의문은 끝이 없다. 


출처 = 영화 <변산> 스틸컷

 시퀀스의 전환마다 들어간 학수의 독백랩은 되려 관객의 몰입을 해친다. 물론 나는 힙합에 무지한 일반 시민이다. 기술적으로 어떤 랩이 뛰어난지 판별할 지식이나 권한이 내겐 없다. 또한 박정민 배우의 브런치를 통해, 그가 적지 않은 랩 연습을 한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렇기에 맘이 무겁다. 그러나 한명의 관객, 청중으로서 듣는 학수의 랩은 수준에 못 미친다. 랩이 삽입된 타이밍은 어중간했고, 가사는 겉돌았으며, 비트는 밋밋했다. 결코 박정민 배우 한 사람의 패착이 아니라는 뜻이다.     



출처 = 영화 <변산> 스틸컷

 확실한 점 하나, <변산>은 웃긴 영화다. 방심하다가 훅하고 들어오는 코믹한 대사들은 생각 없이 파안대소하기 알맞다. 특히 선미 아버지(정규수 분)의 너스레와 쌍욕에선 찰기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웃기되, 우습지는 않아야 한다고 했다. 가족사에 얽힌 진한 트라우마, 어긋난 첫사랑, 서울에서의 실패 등 만만치 않은 문제들을 의미심장한 대사와 가사 몇 마디로 해결보려 드는 모습에서 <변산>은 조금 우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준익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괴테의 말대로, 방황은 도전의 증거다. 도전하지 않았다면 실패나 혹평도 감당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준익=역사극’ 이란 공식을 거부한 그의 시도에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진입 장벽이 높은 랩을 소화하며 또  한번 다재다능함을 입증해 낸 박정민 배우 역시 마찬가지다. 두 영화인의 다음 도전을 기꺼이 기다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소공녀> : 좋겠네요. 어른이셔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