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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Aug 03. 2018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 붙은 곰들의 이야기

“아빠 불!!!!!!”     

 유난히 잠이 오지 않던 밤이었다. 자꾸 짖는 강아지를 달래러 나간 집 뒷켠에서 나는 내 키 세배에 달하는 화염과 마주했다. 보일러실을 태우며 덩치를 키운 불은 이제 막 본채 지붕을 핥던 참이었다. 가족이 잠들어 있는 본채에 불이 옮겨 붙었을 때의 결과는 자명했다.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잠든 가족을 부르며 나는 발화점을 향해 달렸다.    

 

 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주변 통마다 빗물이 모여 있었다. 신의 가호가 실재한다면 그런 종류의 것이리라. 평소라면 결코 들 수 없었을 무게의 통이 종잇장처럼 들렸다. 물을 ‘뿌린다’기 보단 ‘던졌다’는 말이 적절했는데, 화점 반경 5m 이내는 견딜 수 없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반쯤 탄 앞머리 사이로 찌를 듯한 주황빛이 일렁였다. 다행히 불은 보일러실을 전소시키며 사그라들었다.     


 그날 이후, 화재 발생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화마 속으로 들어간다’는 뉴스 앵커의 관용적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은 까닭이다. 그뿐인가. 화재 이후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수포가 온 몸에 잡혀 한동안 고생을 했다. 진화 과정에서 들이마신 연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면 화마 속으로 뛰어들고, 유독 가스를 마시는 게 일상인 소방관들의 삶은 어떨 것인가. 나는 간신히 가늠할 뿐이다.     



출처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 중


 산불 화재 진압에서 ‘진압’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진압의 사전적 의미는 ‘강압적 힘으로 억누르다’는 것인데, 산 전체를 에두른 불을 인력으로 억누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산불을 가두는 일 뿐이다.     


 미국 최정예 산불 진화팀 핫샷(hot-shot)이 ‘맞불 작전’을 애용하는 것도 그래서다. 화재의 예상 진행로의 일정 부분을 먼저 전소시킴으로서 산불을 자연진화 시키는 방법이다. 물론 불이 진행 방향을 바꾸거나, 풍향이 바뀔 경우 소방대원 자신들이 위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소중한 것을 지키는데 필요하다면 한다. 설령 맞불에 바치는 제물이 자신의 목숨이나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이라 해도 말이다.     


출처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 중
“ 제가 지금 그 불붙은 곰이 된 기분이에요”

 

출처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 중

그래닛 마운틴 핫샷의 대장 에릭(조슈 브롤린 분)은 꿈 속 불붙은 곰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망토처럼 화염을 두른 곰은 울부짖으며 달리지만 불은 그를 놔주지 않는다. 유일한 가족인 아내는 밖에서만 영웅인 에릭을 못 견뎌하고, 에릭은 아내의 고통이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 밖에선 일렁이는 화마와, 안에선 가족들을 불행하게 하고 있다는 자책감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희생을 감수한 채 놓은 맞불이 이제 그를 덮치고 있었다. 감수했다 해서 뜨겁지 않은 건 아니었다. Firefighter(소방관)이라는 말은 제 몸에 붙은 불과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인지도 몰랐다.


출처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 중


 <온리 더 브레이브>는 균형 잡힌 영화다. 산불 소방관들과 그 가족들의 일상에 포커스를 맞추되, 산불과 맞서는 장면에선 장면적 스펙타클을 놓치지 않는다. 특히 거대 화염을 표현한 CG 기술은 나무랄 데 없는 리얼리티를 갖췄다. 지극히 평범한 남편이자 아버지인 소방관들이  맹렬한 화염과 마주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진짜 희생에 대한 묵상에 잠긴다. 실제로 2013년 야넬힐 화재에서 그래닛 마운틴 핫샷 20명 중 19명이 화마에 갇혀 순직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작년 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신과 함께 : 죄와 벌>을 떠올렸다. <신과 함께 : 죄와 벌>의 주인공이자 소방관 자홍(차태현 분)은 숭고한 인물이다. 언제나 선한 의도를 기초로 행동하며, 작은 잘못도 두고두고 후회하고 반성한다. 인명 구조에 목숨을 거는 건 소방관으로서 당연하다는 겸양까지 갖췄다.  

   

  반면 <온리 더 브레이브> 속 소방대원들은 퇴근 후 아리따운 아가씨를 유혹하거나 코가 삐뚤어 질 때까지 맥주를 마셔댄다. 참 평범한 사람들. 그러나 왜일까. <신과 함께 : 죄와 벌> 속 자홍보다는 <온리 더 브레이브> 의 대원들이 주는 감동이 훨씬 진하고 여운이 길다. 그들이 낸 용기가 니체의 책 제목처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용기이기 때문은 아닐까. <온리 더 브레이브>는 기억해야 마땅할 사람들을 좋은 신파로 담아낸 좋은 영화다.     




 가끔 자문해 본다. 그때 보일러실을 태운 불이 내 가족을 위협하지 않았다면,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껐을까 하고 말이다. 확신할 수 없었다. 불길에 직접 닿은 적이 없음에도 앞머리칼이 탔고 양 손엔 화상으로 인한 물집이 잡혔다. 우리 가족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어려운 일이기에, 우리는 소방관들을 너무나 숭고한 사람들이라 이상화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원래부터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말이다.     


‘신이시여, 제가 부름을 받을 때는
아무리 강력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
- ‘어느 소방관의 기도’ 중     


 <온리 더 브레이브>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소방에게도 평범한 일상과 사랑하는 가족이 있음을, 제아무리 대단한 장비를 갖춰도 화마로부터 100% 안전할 수는 없음을, 그들도 목숨의 위협 앞에 기도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용기를 내는 것이다. <온리 더 브레이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내하고 희생하는 영혼들을 위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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