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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Jan 14. 2019

영화 <버닝> : 왜 난 가질 수 없나

저런 것들은 죽여 버려야 돼. 사회암적인 새x들

내가 쓴 기사에 처음으로 1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린 날이었다. 경찰이 피의자들을 입건했으나 유죄가 인정돼도 벌금형을 넘지 않을 정도의 사건이었다. 그런 익명의 피의자들이 사회의 암, 죽여 마땅한 것들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었다. 과연 이들의 죄는 그 정도 욕설을 감내할만큼 중한가. 나는 그저 성난 대중에게 물어뜯을 거리를 제공했을 뿐이지 않을까. 퇴근길의 고민은 지난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리 모두가 뭔가에 ‘빡쳐’ 있었다는 것이다. 남는 의문은 ‘왜?’였다.     



영화 <버닝> 스틸컷


영화 <버닝>은 배달짐을 가득 맨 종수(유아인 분)의 뒤를 쫓는 것으로 시작한다. 싸구려 등산복 더미에 휘청거리며 종수는 한여름의 대로를 걷는다. 습기 배출 구멍이 뚫린 반팔 조끼 차림의 종수는 전형적인 3D 노동자다. 더럽고(Dirty) 위험하고(Dangerous) 어려운(DIfficult) 일에 휘청이는 사람들. 모 네티즌이 증언처럼, 아이 손을 잡고 지나가던 한 엄마는 ‘저렇게 안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돼‘하고 아이에게 당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버닝> 스틸컷
“종수야 나 모르겠어? 나야 신혜미. 어릴 때 같은 동네 살았잖아. 나 예뻐졌지? 성형했거든.”
- 영화 <버닝> 혜미의 대사 중     


‘예뻐진’ 동창 혜미와 종수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종수는 ‘사장님이 미쳤어요’ 따위의 현수막을 내건 매장에 배달을 하러 왔고, 혜미는 가게 앞에서 춤을 추며 판촉 행사를 돕는 도우미였다. 이 찰나의 우연은 두 사람을 몇 차례의 만남과 한번의 섹스로 이끈다.      


한번의 섹스에 대한 두 사람의 해석은 판이하다. 카드빚에 쫓겨 연기처럼 부유하며 사는 혜미에게 섹스는 배가 고프면 밥을 먹듯 자연스럽다. 흥분해 어쩔 줄 모르는 종수와 달리 침착하게 침대 밑 콘돔을 꺼내드는 그녀의 손짓이 이를 증명한다. 머문 곳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처럼 가볍고 태연하게.     


오늘 쉬면 내일 굶는 인생들이 그러하듯, 종수는 무미건조한 일상에 스며든 혜미를 사랑하고 만다. 네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너라는 설렘마저 없으면 더럽고 치사한 생업의 현실이 하루를 가득 채울 것이 두려워, 종수는 혜미를 애타게 끌어안는다. 그러나 품에 안을 수 있다면 바람이 아니다.     

  

영화 <버닝> 스틸컷
“종수씨는 너무 진지한 거 같아. 진지하면 재미없어요. 즐겨야지.“
- 영화 <버닝> 벤의 대사 중


홀연히 아프리카로 떠났던 혜미는 둘이 되어 돌아왔다. 포르쉐를 타는 남자 ‘벤(스티븐 연)’이었다. 포르쉐에 올라탄 혜미는 원래 거기가 제자리였던듯 자유롭고 또 행복해 보인다. 나에게 없는 것을 벤이 갖고 있기 때문에 혜미는 나 대신 벤을 선택했다. 적어도 종수는 진지하게 그리 믿었다.      


이창동 감독은 벤의 부(富)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끝내 침묵한다. 억대 연봉자여서, 로또 당첨자여서, 건물주여서 따위의 ‘방법론’이 설명되는 순간 벤의 부는 잘만하면 가닿을 수 있는 무언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설명 대신 벤의 포르쉐와 종수의 구닥다리 트럭, 매사에 집착적이고 다급한 종수의 표정과 늘 여유 있고 상냥한 벤의 제스처를 지속적으로 대비시킨다. 둘 사이엔 키나 피부색처럼 태어남과 동시에 부여받는 격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의 눈앞에 들이미는 것이다. 잔인하지만 영리한 연출이다.     


영화 <버닝> 스틸컷


홀연히 혜미가 집을 비우고 자취를 감추자 종수는 즉각적으로 벤이 혜미를 살해했을 거라고 의심한다. 혜미가 사라지자마자 벤은 또 다른 여자친구를 포르쉐 조수석에 태우고 다녔기 때문이다. 마치 이맘때쯤 혜미가 사라질 것을 안 사람처럼 말이다. 일전에 “나는 두 달에 한번쯤 취미로 남의 비닐 하우스를 태운다“던 벤의 한마디도 종수의 의심을 확증으로 이끈다. 저런 돈 많은 미친놈은 그러고도 남지. 종수와 관객들은 어느새 그렇게 믿고 만다. 잠을 잊은 며칠간의 미행 끝에 종수는 벤을 칼로 찔러 살해한다. 피범벅이 된 종수가 벤의 시체와 포르쉐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것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버닝> 스틸컷


벤은 정말 혜미를 죽인걸까? 영화가 끝나는 순간 또 하나의 의심이 고개를 든다. 종수가 벤의 혐의를 확신하게 된 증거들, 이를테면 벤의 집에서 혜미의 시계가 나왔다는 것과 비닐 하우스를 태운다던 벤의 고백 같은 건 전부 정황증거에 불과하다. 벤과 혜미는 연인 관계였으므로 혜미의 시계가 벤의 집에 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비닐 하우스를 태운다는 벤의 말은 고백이라기보단 농담이나 비유에 더 가깝다. 실제로 종수는 벤의 뒤를 며칠간 형사처럼 미행했음에도 벤이 비닐 하우스를 태웠다는 증거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더 자연스러운 설명은 이거다. 혜미가 벤에게 살해당했다는 편집증적 망상에 사로잡힌 종수가 무고한 벤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혜미는 카드빚에 쫓겨 잠적하기를 반복해 왔다. 그러므로 혜미의 실종은 불어난 카드빚에 의한 잠적으로 보는 쪽이 합리적이다. 벤은 돈 많고 잘생긴 미혼 남성이므로 혜미말고도 벤의 여자친구를 자처하는 여성은 많았을 것이다. 혜미의 빈자리는 자연스레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그럼에도 종수는 이 모든 사실을 자신의 의심을 확신하는 증거로 삼았다. 본디 망상에 빠진 이들에겐 매사가 자신의 망상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보이기 마련이니까.     


영화 <버닝> 스틸컷


종수가 벤에게, 그리고 세상 전체에 ‘빡쳐’ 있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어릴 때 달아난 어머니는 돈이 궁할때만 종수를 찾았고, 분노조절장애인 아버지는 집보다 감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포르쉐와 혜미. 종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벤은 태연하게 누리며 살았다. 종수의 가슴은 분노로 불타(burnning)고 있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자취방은 영화 속 벤의 집 화장실만하거나 그보다 조금 작아 보였다. 몇년만에 학교 앞 고시원을 나와 벤의 화장실만한 이 방을 계약했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만약 벤이 포르쉐를 몰고 와 내 방을 둘러보며 ‘아늑하네요‘ 따위의 감상을 늘어놓을 때, 나와 우리의 가슴을 때리는 건 자랑스러움과 박탈감 중 어느 쪽일 것인가.     


<버닝>에서 옳은 삶의 방향성이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는 이는 실패할 것이다. 이창동은 한 명의 속기사처럼 오늘 날 청춘들의 박탈감과 분노를 정직하게 <버닝>에 담아냈다. 악에 받친 목소리와 표정들을 받아쓰듯 나열하다보니 영화는 약간의 서사적 개연성을 잃었다. 쉬운 말로 사실적인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다. 허구의 이야기로 시대의 진실을 밝히는 예술가를, 우리는 언제나 기쁘게 용서할 준비가 돼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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