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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Apr 12. 2019

영화 <시체들의 아침>: 걸작이 되지 못한 나의 삶에게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고 늙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저버리기 때문에 늙는다.”
더글러스 맥아더(1880.1.26 ~ 1964.4.5.)     

 

 어릴 땐 저 말이 진짠줄 알았다. 간절한 꿈을 가슴에 품은 자의 눈에선 젊은이의 그것에서도 찾을 수 없는 생기가 지하수처럼 솟아오르는 줄 알았다. 나도 꿈을 위해서라면 어떤 도전도 마다치 않는 노인이 되면 멋지겠다는 공상에 빠지곤 했던 날들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던 맥아더는 대통령과의 불화로 보직 해임된  1964년 4월 5일 워싱턴 한 병원에서 쓸쓸히 죽었고, 그의 ‘이상’도 함께 죽었다는 것을. 개인에게 확실하고,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늙음과 죽음 뿐일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언젠가는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 할 순간이 오듯, 이루지 못한 나의 연로한 꿈과도 언젠가는 작별을 고해야 한다.      



영화 <시체들의 아침> 스틸컷

 성재는 이삿짐을 챙기고 있다. TV와 DVD 플레이어의 선을 빼고 이삿짐 박스를 차곡차곡 쌓는다. 거침없던 성재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1000여장의 영화 DVD가 꽂힌 커다란 책장 앞이다. 짧게 내뱉는 한숨에선 채 삭지 않은 미련의 냄새가 난다.      


 얼마 후 성재는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여중생이었다. 성재가 중고 DVD 거래 사이트에 올린 DVD를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도착한 여중생 민지는 현대 좀비물의 조상격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DVD 앞에서 괴성에 가까운 환호를 지른다.      


영화 <시체들의 아침> 스틸컷


 성재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사고 싶다는 민지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 그가 원한 건 일괄판매지 개별판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재의 거절에 민지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연출이 얼마나 뛰어난지, 감독 조지 로메로의 천재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따위를 열거하며 “그럼 여기서 보고 갈게요”라고 선언한다. 왜였을까. 잠시 생각하던 성재는 분리했던 TV와 DVD 플레이어 케이블을 다시 연결해 영화를 재생한다.     


영화 <시체들의 아침> 스틸컷


 성재는 영화 감독이었다. 말 그대로 졸작 좀비 영화 한 편을 찍어봤기에 영화감독일 뿐, 자신이 되고자 했던 영화 감독이 되지 못했음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영화감독을 향한 그의 간절함은 궁핍한 살림살이에도 지독하게 사모은 DVD 더미가 증거하고 있으나, 간절함과 재능이 늘 비례하는 건 아님을 알만큼 그는 나이가 들어버렸다.      


 DVD 1000장을 일괄 구매하겠다는 구매자와 중고 TV 매입자가 들이닥치자 성재는 당황한다. 성재로선 일일이 구매자를 찾아헤멜 수고를 던 셈이다. 그러나 성재는 온갖 핑계를 대며 그들을 밖에 붙잡아 놓는다. 아직, 민지의 영화 시청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상영이 끝난 후 성재의 DVD 컬렉션을 둘러보던 구매자는 “모텔에 둘 건데 야한 게 얼마 없네요”라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성재의 간절한 꿈이 한낱 모텔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성재는 조용히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DVD를 빼돌려 집으로 향하던 민지의 손에 쥐어준다. 과거 자신이 연출했던, 괴이하리만치 허접하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영화 DVD와 함께.



영화 <시체들의 아침> 스틸컷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 (중략) / 그가 부르다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 최영미,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 中     

 

 사랑했던 누군가와 이별하는데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이별의 순간, 좋은 기억만 가득할리 만무할지라도 각자 존재하던 두 선율이 만나 잠시나마 아름다운 화음을 이뤘음을 기억하고 예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한 시절을 떠나보낼 때도 그러한 예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섭게 치열했으나 잊고 싶을만큼 아둔했고, 대책없이 무모했으나 그래서 청춘다웠던 생의 한 페이지를 덮는데도 일말의 정성과 의식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재의 꿈은 죽었다. 나도 언젠간 가닿으리라 다잡으며 사모았던 그의 고전 DVD 세트는 3류 러브 호텔입구를 장식하는 소품으로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성재가 작이 되지 못한 자신의 삶에 낙담하진 않았을 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정말 중요한 건 막무가내 시네필 소녀의 손에 맡겼으니까. 개봉한지 30년이 지난후에도 추앙받는 명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그 DVD를 수십번씩 돌려보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던 자신의 한 시절을 영화에 미친 한 소녀에게 남겼으니 말이다.      


 성재는 “그가 부르다만 노래를 고쳐부르”게 될지 모를 민지의 미래를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꿈은 죽었어도 삶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하며 천천히, 그리고 멀리 걸어갔을 것이다. 언젠가 민들레 씨앗처럼  가슴에 깃들 또 다른 꿈을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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