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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Mar 02. 2018

<리틀 포레스트>:예쁜 것만 담아서, 정갈하게

작은 숲 속 사람들 이야기

'자연으로 돌아가라'
- 장 자크 루소(1844.5.21 ~ 1910.9.2)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왼쪽부터 재하, 은숙, 혜원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요 등장인물은 세 명이다. 도시에서 취업을 준비하다가 시골 고향으로 온 혜원(김태리 분), 시골 협동조합 직원이지만 언제나 가슴속 한편에는 상경의 꿈을 키우는 은숙(진기주 분), 도시의 직장생활을 접고 귀농한 재하(류준열 분). 시골 학교에서 허물없이 자란 세 동창은 혜원의 낙향을 계기로 고향 마을에서 모이게 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리틀 포레스트>는 신토불이형 ‘먹방’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 수준의 음식들이 등장한다. 누룩을 띄워 담근 막걸리, 직접 딴 밤으로 만든 달착지근한 밤조림, 아삭한 소리가 그 맛의 반인 총각김치까지... 앵글 안에 정갈하게 담기는 요리들을 보고 있으면 부산하던 마음이 평안을 되찾는 듯한 기분이다. 임순례 감독은 주연 배우들이 음식의 재료를 채취하는 과정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음식은 예쁜 그릇에 담기고, 영화를 보며 평온해지는 관람객의 마음이 담길 그릇은 배우들의 익살스러운 연기인 셈이다. 음식도, 마음도 정갈하고 예쁘게 담아내는 영화다.     


 하지만 음식만큼이나 내 주목을 끈 건 상경의 꿈을 가진 은숙과, 혜원이 고3일 때 집을 나간 혜원의 엄마(문소리 분)였다. 사계절 제철 식재료로 매일의 끼니를 충당하는 전원의 삶이 이토록 정겹고 푸근하건만, 은숙은 영화 내내 서울로 가자 중얼거리고 혜원의 엄마는 오래전 마을을 떠났다. 왜 두 사람은 이 충만한 시골 생활에 염증을 느꼈던 걸까?      


 영화에선 표현되지 않았으나 리 단위 시골 마을에 살다 보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매번 택배비까지 꼬박꼬박 치르건만 물건 한번 집에서 받으려면 동네 택배 기사에게 통사정을 해야 한다. 잘못 건드려 인터넷 랜선이 망가지면 수리비보다 출장비가 몇 곱절은 더 나오므로 컴퓨터 책상 앞에선 경거망동치 말아야 한다. 농산물의 판로가 하나 둘 막히면서 찾아온 가계 불안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무엇보다 – 뉴스에 매달 보도되듯 – 시골에는 사람이 없다. 지지고 볶는 인간사에 치를 떠는 사람에겐 이만한 천국이 따로 없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시골은 유배 생활 비슷한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시골 생활이 도시보다 힘들다는 엄살이 아니다. 도시인에겐 도시의 애환이 있듯 시골도 그러하다는 것뿐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인간을 가슴속에 불멸하는 무언가를 믿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가슴속에 불멸하는 무언가. 단체 생활에 지친 도회지 사람들에게 그것은 시골과, 그에 대한 환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리틀 포레스트>는 그런 도시인들에게 인상 깊게 남을 영화임이 분명하다. 직접 채취한 식재료를 비비고 버무려 예쁜 그릇에 정갈하게 담아 먹는 작은 숲의 전설. 충분히 가까이서 들여다본다면 이 작은 숲 안에서도 증오와 미움, 공허 따위의 감정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으나, 영화에서 이 부분은 배제되었다. 영화의 주 소비층인 도시인들에게 필요한 건 숲의 현실이 아닌 '동화'니까. 언젠간 동화 같은 그곳으로 떠나리라. 그렇게 소박한 환상으로써 가슴속에 남아 팍팍한 도시의 하루를 견디게 해줄 만큼 예쁜 동화. 이것을 감독의 창작 의도로 본다면 <리틀 포레스트>는 그 의도에 충실히 부합하는 성공작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주인공 혜원은 “잠시 들른“ 시골 고향에 매력을 느껴 한해를 거기서 보내지만 결국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도시에서 다친 마음을 동화 속 세상에서 추스른 후 다시 도시의 현실로 돌아간 것이다. 동화는 결국 동화로 남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리틀 포레스트 개봉 후 쏟아진 찬사는 귀농과 귀촌에 대한 소망 표출로 이어지고 있다. '귀농 장려 영화'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등장했다. 하긴, 왜 아니겠나. 철학자 칼 마르크스는 산업 자본주의의 병폐로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를 들었다. 회사나 공장에 소속된 노동자들은 특정 상품을 생산하는데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정작 노동의 결과인 생산물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산물의 가치를 100으로 가정할 때 노동자가 자본가(고용주)로부터 받는 임금은 5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마르크스의 시각에서 귀농은 노동자(농부)와 생산물(수확물)의 소유자가 일치되는, 이상주의적 노동을 선택한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잘 담아냈듯 맑은 하늘과 구수한 흙냄새, 사람 없는 시골길의 적요함은 덤이다. 그러나 그게 시골 살이의 전부는 아니다.


 “거기선 내가 살아있는 것 같더라.”


 하나둘 각자 진학할 대학이 정해질 무렵 친구가 내게 한 말이었다. 나와 함께 시골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는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는 나를 몹시 부러워했다. 얼마 전 수도권 대학의 면접을 보고 돌아온 그는 텅 빈 고향의 길거리를 보고 “숨이 턱 막혔”다고도 덧붙였다. 누군가에겐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의 한갓진 길목일진대, 친구에겐 그게 유배살이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때의 친구와 <리틀 포레스트>를 봤다면, 그는 어떤 평을 남겼을까. 모르긴 몰라도 흡족한 평을 기대하긴 어렵지 않았을까.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 <리틀 포레스트>는 생채기 가득한 가슴속에 불멸로 자리할 작은 숲이 되어줄 것이다. 땀방울처럼 맑은 사람들이 예쁘고 정갈하게 생을 영위한다던 동화 속 작은 숲이. 그 작은 숲의 전설이 지친 도시인의 하루를 견딜 수 있게 한다면 그걸만으로도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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