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언 Jun 08. 2018

『천천히 그림 읽기』 : 미술관이 두려운 당신이라면

    

피카소, 마드리드, 1937년, 유화, 349 x 776.6cm 출처: 미술대사전(용어편)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피카소 그림 한번 보겠다고 시골에서 홀로 상경한 초등학생이었다. TV 전파도 잡히지 않는 산골의 적막함은 교양에 대한 갈망을 부추겼다. 이 갈망에는 방학이면 내려와 새로 산 카메라폰을 자랑하는 사촌 형들에 대한 얄미움도 한 몫했다. 저 형들이 갖지 못한 무언가를 가져야겠다. 어린 나는 되뇌었다.      


 사촌 형을 데려온 이모들은 내가 틈만 나면 마룻바닥에 드러누워 『람세스』 같은 대하소설을 읽어대는 모습을 보며 혀를 둘러댔다. 어린 게 벌써 교양이 있네, 어쩜 그리 책을 좋아해 따위의 말이 엄마들 사이에서 오갔다. 말 그대로 심심해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던 내 귀에 ‘교양’이라는 두 글자가 내리 꽂혔다. 바로 이거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 목표는 ‘교양인’이 됐다. 내가 새로 나온 <해리포터> 영화에 대해 침묵해야 하듯, 내가 교양 넘치는 이야기 꺼낼 때 서울 애들도 입을 열지 못하게 하리라. 촌구석 땅꼬마가 아는 교양의 상징은 책, 그리고 미술 두 가지뿐이었다. 책이야 이미 가운데 접착제가 뜯어져 종이가 쏟아지도록 보고 있으니 남은 건 미술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나를 터미널에 데려다 달라 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주한 피카소였건만, <게르니카> 앞에서 내가 느낀 첫 느낌은 상상하던 것과 달랐다. ‘뭐 이리 커?’가 전부였으니까. 전설의 대작을 영접함과 동시에 감동의 눈물이 두 뺨을 적시는 서사 따윈 없었다.  잘린 소머리와 사람의 팔다리가 굴러다니는 거대한 캔버스 나는 당최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당시 내 양옆으로는 전시장 안 무거운 공기만큼이나 엄숙한 표정의 어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을 보며 나는 예단했다. 저들은 뭔가를 ‘알고 ‘ 본다. 교양인이 되려면 나도 저들이 아는 걸 알아야겠구나. 당시의 어른들도 어린 나만큼이나 미술에 무지하다는 걸 알게 된 건 십여 년이 지난 후, 예술의 전당에서 일할 때였다. 어쨌든, 수권의 미술사 책 탐독과 교양 미술사 강의, 미술 전시장 근무로 이어지는 미술과의 질긴 교양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어려운 이론을 학술용어로 늘어놓기보다 되도록 그림을 예로 들어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나름대로 그중의 어느 한 방법을 택해 미술작품을 볼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

                                                                             - 조이한·진중권, 『천천히 그림 읽기』, ‘지은이의 말’ 중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프레스코화, 823.5x579.5cm, 1510, 서명의 방(바티칸 박물관)


 근대 이전까지 그림은 귀족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물감이 귀했던 당시로선 화가 본인 만의 힘으로 재료값을 충당하기란 불가능했다. 화가들은 유력 귀족 혹은 성직자들에게 작품을 의뢰받고, 그 임금으로 재료값과 생활비를 충당했다. 자신들의 교양에 강한 자부심을 가진 귀족들은 의뢰한 그림이 어지간한 지식으로는 해석될 수 없을 만큼 난해하기를 바랐다.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화가들은 작품 안에 여러 상징들을 숨기기 시작한다. 이 같은 전통은 오늘날 우리에게 미술이 ‘어렵고 난해한 것’이라는 선입견을 씌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약속된 상징이 그림에 잘 드러난 예로 바니타스 정물을 들 수 있다.


피터 클라르, <바니타스>, 1630년


 바니타스 정물에서 해골은 엄습해올 죽음을, 모래시계는 시간의 유한성을 가리킨다. 또한 시든 꽃과 싱싱한 꽃의 대비는 삶과 죽음의 대비를 뜻한다. 바니타스 정물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위의 정물화를 보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주제 의식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가 미술에서 만큼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화가의 생애에 대한 지식도 그림 감상의 주요한 요소다. 반 고흐를 귀 자른 미친 예술가 정도로 아는 사람과, 고흐의 질곡 많은 인생사를 줄줄 꿰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두 사람이 고흐의 자화상을 본다고 할 때, 두 사람이 그림으로부터 받는 감상과 정한은 얼만큼 차이가 날까? 침엽수 잎과 연꽃잎만큼의 차이일 거라고 나는 감히 확신한다. 고흐를 알기 전의 나와 후의 내가 본 고흐의 그림은 그토록 달랐다.

      

 이쯤 되면 그림이 왜 귀족 문화의 대표 주자였는지 뼈저린 깨달음이 찾아온다. 평생 먹고살 만큼의 유산이 있지 않고서야 누가 그림 하나 보자고 이 많은 공부를 할 것인가. 『천천히 그림 읽기』는 그림 앞에서 무력감에 빠진 일반 독자들을 위한 안내서다. 그림 속 상징을 살피는 것, 화가의 생애라는 돋보기를 쓰는 것, 정신분석학이라는 메스를 가져다 대는 것 등 여러 방법이을 준비 해 뒀으니, 독자들은 마음 가는 대로 하나를 골라 그림을 읽으라고 권한다. 책에는 없는 자신만의 감상법이라 해도 상관없다. 애초에 그림 읽기에 정답 같은 건 없으니까.   


  제아무리 화가가 심각한 주제의식 하에 작품을 만들었든지 간에, 작품을 읽는 수용자의 감상에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다. 그 정도 오독이 두렵다면 화가는 작품을 전시할 게 아니라 자기만의 밀실에 걸어뒀어야 옳다. 모쪼록 자신에게 유익하고 흥미로운 방법으로 그림을 읽어내면 그만이다. 정해진 답 같은 건 없으니 끌리는 감상법을 가벼이 선택하시라.『천천히 그림 읽기』는 제목처럼 천천히, 그렇게 설득하고 있다.     



 

 대학 시절, 나는 현대 미술사 같은 교양 강의를 청강했고, 중고서점에서도 미술사에 관한 책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반년 간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장 스텝 일을 하기도 했다. 지식의 힘으로 미술의 진입 장벽을 관통하고자 했던 <게르니카> 앞 소년의 결심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내가 느낀 감동의 진폭은 늘어가는 내 미술 지식의 양에 정비례했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화가가 숨겨놓은 지식의 퍼즐을 찾으며 탐정의 쾌감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이론화된 지식 체계가 순수한 미적 감동을 방해한 적도 적지 않았다. 조이한, 진중권 두 저자가 이런 내 고민을 듣는다면 뭐라고 했을까. 수많은 감상법 사이에서 유쾌한 방황을 하는 것, 그게 그림 읽기죠.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훗날 미술관에서 여전히 거대할 <게르니카>를 재회하게 되는 날, 감상하는 내 모습이 조금은 유별나져 있기를 바란다. 거대한 캔버스 왼쪽에선 셜록 홈즈에 빙의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퀴즈 풀기에 열중일 것이며, 반대편 화면 앞에선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이처럼 그저 의미 없는 감탄사만 연발하리라. 내게 가장 큰 흔적을 남기는 감상법을 자유롭게 취사선택해가면서, 그렇게 천천히 그림을 읽어가는 내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 콜드 블러드』: 글쎄, 너라고 달랐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