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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Jul 03. 2018

『나라 없는 사람』 : 어느 회의주의자의 희망

커트 보네거트 회고록

 남자는 농담하기를 즐겼다. 남들이 농담거리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는 농담을 해댔다. 그가 날 때부터 밝은 사람이어서는 아니었다. 되려 진한 농도의 어둠이 그의 내면에서 도사렸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농담을 해댔다. 남자의 이름은 커트 보네거트(Kurt Vonegut). 미국이 자랑하는 소설가이자 풍자가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그는 포로 신분으로 독일 드레스덴에 구금됐다. 전쟁 막바지인 1945년 2월 14일, 영국과 미국은 드레스덴 전체에 고성능 폭탄을 쏟아 부었다, 민간인을 포함한 약 3만명이 사망했다. 그 자신이 인정했듯, 포로였던 그가 생존한 건 기적보단 미스테리에 가까웠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농담을 해대기 시작했다. 드레스덴 폭격을 다룬 『제 5 도살장』에선 누군가가 사망하는 장면마다 “뭐 그런거지”를 붙여가며 익살을 떨었다. 『제5 도살장』 한 권에서만 106번의 ‘뭐 그런거지’가 등장한다. 인류에 대한 마지막 신뢰를 잃은 자의 농담에선 비릿한 맛이 났다.     



“ 제발 엽총을 들고 거리로 나가시오. 12구경 2연발총이면 딱 좋을거요. 거기 당신 동네에서 경찰은 제외하고 무장했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머리를 날려버리시오. ”-
-『나라 없는 사람』, 32p, (이라크는 위험하니 제제가 필요하다는 독자에 대한 답-필자)   

  

“ 네이팜탄은 하버드에서 발명되었다. ‘VERITAS(진리, 하버드대의 모토)’란 그런 것인가?”
-『나라 없는 사람』, 89p          


 나는 진보와 희망에 대한 책을 싫어한다. 최소한 돈 주고 사진 않는다. 인간은 진보해가는 동물이며 진보를 멈추지 않는 한 희망은 존재한다는 확신에는 도통 정이 가지 않는다. 삶에는 정답이라는 게 존재해서 제대로 실천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서적 확신은 말할 것도 없다. 희망과 진보로 물샐 틈 없이 꽉차 보이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나는 나 혼자만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나라 없는 사람』은 그리 희망찬 내용은 아니다. 보네거트스럽달까. 그는 국가와 정치가들에 대한 혐오, 인생에 대한 회의, 집단 지성에 대한 조롱을 떳떳하게 드러낸다. 하긴, 희의주의가 극에 달해서 자신을 ‘나라 없는 사람’임을 자처하는 이에게 긍정을 바란다면 욕심이다. 헌데 왜일까. 사정없이 비꼬아대는 농담을 따라 킥킥거리고 있으면 문득, 가슴 한켠을 짓누르던 납덩이가 녹아내린다. 그리고 다시금, 그 징글징글한 세상 밖으로 나가 한바탕 논쟁하고 싶어진다. 세상의 모든 헛소리들에 대해 말이다.     



“ 모든 권력은 억측가들(나쁜 정치인들) 손에 있다. (중략) 그들은 생명을 구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들이 증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명한 사람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현명한 사람이 되어달라. 그래서 우리의 생명과 당신의 생명을 구하라.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달라.”
-『나라 없는 사람』, 93p     


 칭찬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너무 남발하면 신뢰도가 추락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예쁘다”, “멋있다”를 인사처럼 하고 다니는 사람의 칭찬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다. 역설적이게도 잘 먹히는 칭찬은 칭찬에 인색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들이다.      


 어쩌면 희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선거 벽보를 채운 ‘희망 가득한 내일’ 따위의 구호를 믿는 이는 거의 없다. 그보단 지독한 회의주의자의 입에서 발화된 희망이야 말로 진짜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오늘도 내일도 엿 같겠지만, 좀 더 많은 이가 연대해 애쓴다면 모레는 조금 덜 엿 같아 질거라는 한 가닥 희망 말이다. 『나라 없는 사람』이 희망에 관한 책인 이유는 그래서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은 농담을 정신건강의 주요한 요소로 꼽았다. 유머를 잃었다는 건 자동차에 완충장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많은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웃을 수 없는 이유만이 가득한 그곳에서 말이다. 대부분이 자괴감 가득한 농담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농담할 여력마저 잃어버린 수용자들이 가장 먼저 죽기 시작했다고 빅터 프랭클은 증언했다. 달리는 길이 거칠수록 인간은 웃어야 한다.      


 그러니 농담을 하자. 혁신을 잊은 정치에 대하여, 개선의 여지가 없는 현실에 대해서 말이다. 자조적이든 억지든 상관없다. 보네거트가 드레스덴의 비극에 대해 농담으로 생을 견뎠듯,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우리에게 역시 농담이 필요하다. 혹시 아는가. 부조리한 오늘에 대해 너도나도 농담을 하기 시작한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피식’하고 웃는 내일이 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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