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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May 20. 2020

미워하고 불화했던 나의 몸에게


“넌 누굴 닮아 그렇게 눕는 걸 좋아하니.”     


 틈만나면 책을 쥐고 드러눕던 아들을 향한 엄마의 염려는 아들이 25살을 넘기면서 주파수를 달리해야 했다. 조금만 덜 달리라고. 이틀 뛰면 하루는 쉬라고. 그러다 다친다고.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앉고 일어설 때마다 근육통으로 끙끙 앓는 나를 놀리는 것으로 모임의 첫 대화가 시작되곤 했었다. 평균 심박수 178bpm 수준으로 10km를 주 6일씩 달렸으니 온몸이 덜그럭거리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면서도 달리기라는 명목의 혹사를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나에게 몸이란, 후려치고 몰아세워서 극복해야 할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라고 처음부터 내 몸을 인생의 훼방꾼 정도로 치부한 건 아니었다. 그전엔 관심도 없었다는 말이 좀 더 적합하겠다. 그도 그럴것이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의 나는 귀농한 부모님 소유의 산과 밭을 매일같이 쏘다니던 시골소년이었다. 걷고자 한 만큼 걸을 수 있었고, 오를 곳이 없을 때까지 오를 수 있던 나날들. 카잔차키스식 표현대로 하자면 ‘대지와 가장 가깝던’ 그 시절, 나와 내 육체 간에는 그 어떤 잡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일종의 심신합일의 경지였달까.     


 고등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스트레스로 몸무게가 110kg을 돌파하면서 나의 평화는 산산조각났다. 같은 반 아이들은 틈만나면 나를 두고 육덕지네 돼지네 하며 농담을 꽂았고 거기에 나의 겁 많고 소심하던 성격이 합쳐지며 치명적인 시너지를 발휘했다.   

   

 반의 일진 몇몇은 내 뒤통수를 과녘삼아 지우개 조각을 누가 더 많이 맞추는지 내기를 걸곤 했다. 막 이성에 눈 뜬 나였으므로, 일진들을 따라 반 여자애들이 함께 깔깔 웃을때면 딱 죽고 싶은 기분이 되곤 했다. 내가 왕따를 당하는 건 내가 뚱뚱해서다. 이 불어터진 몸만 아니었어도 나는 행복할 수 있었을텐데. 전역 후 극한의 운동으로 살을 빼기 전까지, 나는 내 몸을 성실히 증오했다.      


 이후 몇 년간 잊고 지내던 몸의 재등장은, 말 그대로 미친듯한 심장박동과 함께였다. 공황장애였다. 계단 오르기나 만원 지하철 타기 등 일상적인 수준의 자극에도 극한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이 질환은 마취가스처럼 확실하게 내 내면을 마비시켜 가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자극할 수 있는 상황은 무조건 피했고, 피치못할 약속이 없는 한 원룸 안 침대를 벗어나지 않는 날들이 늘어났다. 빨리 잠들어서 이 불안이 잠시나마 멈추길 기도하면서. 달리기가 공황장애를 비롯한 우울증, 집중력 장애, 중독 등 수많은 정신 질환에 약물만큼의 효과를 줄 수 있다는 주장 -존 레이티 하버드의대 교수의 『운동화 신은 뇌』 - 을 접하기 전까지, 어두운 방안에서 갇혀지낸 징역의 시간을 나는 소리없이 흐느끼며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한 달리기였으니 ‘건강에 좋을만큼 적당히’라는 기준이 들어설 자리는 애초에 없었다. 몸만 아프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이었다. 고등학교 때 겪은 왕따부터 공황장애까지, 이 몸이란 놈은 매번 아침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지독한 악역을 자처하며 내 삶에 끼어들었다. 달리는 동안 숨이 가쁘다못해 비릿한 피냄새가 섞여들어도, 발 뒤꿈치가 콕콕 쑤시는 족저근막염 증상이 나타나도 전부 무시했다. 아니, 더 삼엄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왜였을까. 나는 나를 벌하고 싶었다.     




 수년간 모질게 달려온 결과, 나의 공황장애는 전에 비하면 기적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좋아졌다. 급상승하는 심폐지구력에 반비례해 평균 심박수는 일반인 평균보다 낮아졌고, 만원 버스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탈 수 있게 됐다. 삶과 생존의 문제들은 여전히 엄존했으나, 최소한 불안이 나타날까봐 불안해하고, 그렇게 불안해 하는 나 자신을 다시 불안해 하는 나날들은 점차 멀어져 갔다. 최소한 부유하지 않고 땅위에 발붙인 고민을 하며 살 수 있게 됐음에 나는 잠시나마 감사했다.

 

 섣불리 안도하던 즈음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수년간 트렉 위에서 매일같이 혹사당해온 몸이 기어이 무너진 것이다. 족저근막염으로 시작된 통증이 디스크와 좌골신경통으로 번졌고, 나는 이제 달리기는커녕 환갑을 앞둔 엄마의 걷는 속도도 맞추지 못할 지경이 됐다. 또 시작이냐 이 망할것아. 오랜 관성대로 몸을 탓하기 시작할 무렵, 정신과 의사 문요한이 내게 말을 건넸다.     


제가 아픈 데가 어디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무릎을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무릎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눈을 감았습니다. (중략) 
“다른 사람의 고통은 함께 가슴 아파하면서 왜 내 고통은 모른척 해! 다른 사람들이 힘들다고 하면 따뜻한 위로를 해주면서 내가 힘들다고 하면 왜 나를 구박해. 내가 꾀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내가 쓰러져야 그때 가서 관심을 가져줄거야?”
- 문요한, 『이제 몸을 챙깁니다』中


 나는 내 몸을 긍정했던 기억이 한번도 없다. 어렸을 땐 관심이 없었고, 사춘기 이후로는 매번 극복과 투쟁의 대상으로만 바라봤다. 하루 4시간 이상의 극단적인 운동으로 날렵한 몸매를 가졌을 땐 헬스장 거울 앞에서 사진 찍기를 즐겼으나, 그건 한심한 몸을 극한까지 몰아붙여 얻어낸 결과였으니 몸의 긍정보단 되려 부정의 산물에 가까웠다. 바위를 옮기다 허덕이는 노예에게 채찍을 휘두르곤 ‘이제야 말을 듣는군’ 흡족해하는 노예상 같았달까. 


 고통스럽기 이전에 외로웠겠구나. 유일한 대화 상대인 내가 단 한번도 네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은 나였으니까. 왕따의 공허함을 더 많은 음식으로 채웠던 고등학생 때도, 공황장애가 올 만큼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도, 치유를 넘어 형벌에 가까웠던 달리기에 다리 곳곳이 비명을 지를때도 나는 너를 질책했을 뿐, ‘요새 힘들어? 나한테 말해봐’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으니까. 미안해. 문요한의 책을 덮고 집으로 돌아오던 밤거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몸에게 사과했다. 


몸이 우리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을 배신해 온 것입니다. 몸은 늘 우리를 돌봐주었고 우리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몸은 끝까지 내편입니다. (중략) 삶의 시작부터 나와 함께 살아오고, 나를 위해 헌신해 온 내 몸에게 따듯한 주의를 기울이고 몸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 문요한, 『이제 몸을 챙깁니다』中


  시간의 비정한 풍화 작용 속에서, 나는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사위여 갈 터다. 계단만 올라도 숨이 차오를테고, 유연하던 관절들이 하나하나 백기를 올릴 것이다. 그리고 끝내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몸과의 길었던 동행은 막을 내리게 된다. 죽음이 몸과 나의 결속을 풀어헤칠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난 내 몸의 유일한 변호인이 돼줘야 하는 게 아닐까. 세상과 타인들은 더 하라고, 더 가라고 윽박질러도 나만은 그럴 수 없다며 언제나 몸의 편에서 변호해 가려한다. 


 나는 이제 다시 달린다. 여전히 기록 욕심은 건재하지만, 돌처럼 뭉친 허벅지를 후려쳐 가며 달리는 행동은 이제 하지 않는다. 예전에 비하면 걷는 쪽에 더 가까운 속도일지언정, 내 몸의 기분과 안녕을 더 중시하며 달린다. 그리고 그날의 체력이 허락하는 지점에서 멈춘 채 가슴팍을 쓸어내리며'수고했어' 한 마디를 몸에게 건넨다. 그렇게, '이제 몸을 챙기면서' 가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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