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다시 읽고 다시 쓰다.
의외로 책중독자들이란 족속은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않는다. 그만큼의 인상을 남기는 책을 만나기도 쉽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자취방 침대맡에서 내 손길을 기다리는 수십권의 책들 때문이다. 약속 장소에 10분이라도 먼저 도착하면 주변 중고서점부터 찾아 책사냥에 나서는 버릇의 말로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자다가 팔이라도 휘두르는 날엔 책에 ‘맞는’ 게 아니라 ‘깔리는’ 거 아니야? 농담만은 아닐 짓궂은 상상. 이 책 정도는 다시 읽어볼까 했던 마음이 썰물이 밀려간 모래사장처럼 바싹 마른다. 인스타그램 속 독서가들처럼 읽을 책만 딱딱 사서 읽으면 에브리바디 해피 이련만. 언제쯤 책 따위 안 읽어도 좋으려나. 기꺼이 뒤집어쓴 이 지긋지긋한 굴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다시 집어들고 마는 책이 있기 마련이다. 썰물이 떠나온 자리에 습기를 남기듯, 가슴 한 켠에 쉬이 증발되지 않는 이슬 몇방울을 빚어놓고 떠나는 책들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 이슬들은 어떤 의문일수도, 멋대로 각인돼 지워지지 않는 한 장면일 수도 있다. 어쨌든 다시 읽을 책은 읽게 되기 마련이다. 내겐 스물다섯, 5년전 텅 빈 동아리방에서 홀로 읽었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가 그랬다.
‘특별하다 싶을만큼’ 못생긴 한 여자와, 끝사랑이 된 그녀와의 사랑을 회고하는 삼십대 작가의 이야기는 서슬 퍼렇던 스물다섯의 청년에게 어떤 물음표를 남겼을까. 책 속 화자처럼 삼십대의 작가가 된 나는 나름의 해답을 찾았는가.
“웃지마. 웃으면 더 이상해.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나면 누구라도 웃을 수 없을거라 생각합니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中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를 표현하는데 있어 이런저런 잡다한 수식은 불필요하다. 아니, 불필요하다고 세상은 생각한다. ‘못생긴’이라는 수식 하나면 그녀의 전존재를 담아내는데 모자람이 없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옆사람을 향한 혐오와 멸시말고는 자신을 높이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악다구니 한번 써보지 못할만큼 그녀는 기진해 있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 한 남자 ‘나’가 있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그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경위는 모호하고 또 불분명하다. 그러나, 촌스럽고 억척스러운 아내를 버림으로써 “끝끝내 아름다운 것만을 사랑한 인간”임을 증명한 남자의 아들인 그의 사랑이 하필 못생긴 그녀를 향했다는 점은 역시 공교롭다.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은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며 아버지가 했던 선택의 정반대만을 고집함으로써 실은 그 누구보다 아버지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는 흔한 아들의 복수심인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만 생각하면 회색빛 선글라스 쓴 듯 무채색이던 세상이 클로드 모네의 그림처럼 다채로워지는 마술을 설명할 길이 없다. 어쨌거나 그의 사랑은 그 생애를 시작했고, 그는 사랑에 빠진 한 남자에 불과하다.
그가 점유하는 그녀의 가슴 속 영토가 늘어감에 따라 그녀의 불안도 몸집을 불린다. 그의 사랑이 분위기에 휩쓸린 한때의 착각 혹은 치기어린 불장난이 아닐지 그녀는 번민한다. 어쨌거나 그녀는 못생겼고, 그는 두어번의 고백을 받을만큼 준수한 외모의 대학생이니까. 더구나 1980년대. 대학생이라는 신분만으로도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다는 도시 전설이 온 사회를 장악했을 때였다. 결국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남으로써 닥쳐올지 모를 실연의 상처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택한다. 나도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믿어보기엔 사회가 그녀에게 가해온 상처가 너무 잔인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났다는 말은, 누군가의 몸 전체에-즉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린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버렸다는 말임을”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中
그런 사랑이 있다. 시간의 풍장(風葬)을 거부한채 살아남아 기억 속에서 몇 번이고 재상영되는 사랑. 여기에 이런 장면이 있었구나. 지루함 대신 놀라움과 감사함만을 더해가는 그런 사랑. 30대의 인기 작가가 된 그는 그녀가 남기고 간 거대한 공백 앞에서 깨닫는다. 태어난 땅으로 회귀하는 은어처럼 그는 떠난 그녀를 다시 찾아간다. 그리고 은어의 일생이 그러하듯, 짧은 재회를 마친 후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한 문장으로 축약하라면 이것이다.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너무 진부해서 영문 티셔츠 문구로도 못 쓸 이 한 문장이 무려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이 될 수 있던 비결은 간단하다. 문장 속 ‘한’과 ‘여자를’ 사이에 “못생긴”이라는 단어를 넣는 것이다. 지독히도 못생긴 그녀를 끝까지 사랑한 남자가 존재했다는 상상만으로도 놀라운 소설이 될만큼 “세상은 더없이 이상한 것”이었다.
존 롤스는 1971년 ‘정의론’이라는 이름의 이론을 집대성해 철학사에 지워지지 않는 발자취를 새겼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한 가지 특정한, 어쩌면 소설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어떤 상황에 처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상대는 물론 나 자신의 인종, 성별, 나이, 학력 등 모든 생물·사회학적 조건을 알 수 없는 완전한 블라인드의 공간,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 그것이다.
나 자신과 당신의 그 어떤 사회적 조건도 공란이 된 이 마법적인 공간에서는, 누구나 누구에게든 평등한 법과 제도를 구상하고 실행하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롤스는 생각했다. 무지의 베일 안에서 흑인에게 차별적인 법을 만들었다가, 베일이 걷혔을 때 정작 자신이 흑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 모두 벌거벗은 채 이 땅에 던져지듯 태어난 가련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 공유된 장막 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할 수 있을 거라고 롤스는 믿은 듯 보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어쩌면 진짜 사랑도, 좋은 인간이 된다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결혼 시장이라는 살벌한 정글에서 내가 나로서 쟁취할 수 있는 최대 값어치의 인간을 낙찰받는 게 아니라, 곧 시시해질 내가, 나란히 시시해져 갈 수많은 인간들 중 하필 눈에 밟힌 당신과 함께 걸어가는 것. 이목구비에 좌우대칭의 비례미를 갖춘 이성을 찾아내라는 유전자의 명령은 잠시 뒤로 미루고, 10년도 못가 볼품없고 시시해질 외양에 싸인 ‘진짜 그녀’를 보는 눈을 갖는 것. 유전자의 명령은 이기적인 만큼 강력하고, 인류 역사상 무지의 베일 따윈 존재한 적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것. 그런 사랑이 진짜에 가깝지 않을까. 혼자였던 동아리방으로부터 5년 뒤, 어느새 책 속 화자처럼 30대의 작가가 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결국 아름다운 것만을 사랑한 인간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예감은 씁쓸했다”
(2016년 10월 21일, '<죽은왕녀를 위한 파반느>:세상모든 그녀들에게 바칩니다' 서평 中)
이 책을 다 읽은 스물다섯의 나는 이렇게 썼다. 덧없는 아름다움에 목숨을 걸고, 더러는 그렇지 아니한 것들의의 너머를 보려는 노력에는 인색한. 늘 그러했듯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스물다섯의 예감은 적중 했을까. 아니면 일부라도 극복해 냈을까. 서른살의 나 역시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영 시원치 않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나이가 먹을수록 확신에 차 쓸 수 있는 단어의 사전은 되려 빈약해져만 간다. 사랑도, 인간도, 인생도, 나 자신이라는 존재도... 서른이 되면 조금은 더 분명하고, 덜 흔들리고, 확신에 차 있을 줄 알았다. 정말 그랬다.
'노력하고 있어'
스물다섯의 내가 책 모퉁이에 적어둔 질문에, 서른살의 나는 다만 그리 답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