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그런 날 있지 않나. 나를 뺀 내 또래 모두는 빛나는 미래로 전력질주 해가는 것 같을 때. 근데 나는 제자리 걸음도 벅차서 헉헉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하지만 내가 그렇게 벅차하는 건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을 때. 이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랑’이라는 방어기제를 전면에 내세우곤 한다. 설득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나 괜찮다고, 나도 나름 괜찮게 살아내고 있다고, 남들과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 시도한다. 이 서글픈 시도가 유효할지, 미수에 그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하게 된다. 나도 그러하다. 내 주된 자랑의 주제가 ‘외상되는 해장국집을 가졌다’는, 다소 자랑 같지도 않은 자랑이라는 점을 빼면 말이다.
4년전, 고시촌에서 맞은 첫 겨울은 유달리 추웠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자신은 총무가 아닌 고시원 총책임자라며 너스레를 떨던 고시원 총무는 방이 춥다는 내 컴플레인에는 ‘나는 총무에 불과하다’며 기가 막힌 겸양의 미덕을 보이곤 했다. 실제로 그해의 기온이 이전해와 이듬해에 비해 더 낮았는지, 외출 자제 권고가 내려졌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그해가 내겐 몸보다 더 얼어붙은 마음에 떨며 보냈던 한파의 시간이었다는 것 뿐이다. 추워서였는지, 잠을 이루지 못해서 였는지, 그때의 나는 술을 마신 날보다 안 마신 날이 더 많았다. 그래서일까. 둘도 없는 단골이 된 우리 집 앞 5분 거리의 청송 해장국과의 처음은 물속에서 맨눈을 뜬 양 흐릿하다. 지독히도 얼어붙었던 어느날 밤, 밤바다를 유영하던 물고기가 따스한 집어등(集魚燈) 불빛에 이끌리듯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을까 가늠할 뿐이다.
“니 또 술 먹었나!”
“에이, (얼마) 안 마셨어”
“그래, 술 많이 먹지마라야”
세 번 중 두 번은 술을 마신 채로 찾아오는 단골 덕에, 나를 반기는 이모의 인사는 언제나 잔소리였다. 그럼 난 불콰해진 얼굴로 안 마셨다는 뻔한 거짓말을 주워섬겼다. 이모는 모를 테지만 난 사실 이모의 잔소리를 좋아했다. 매일 술을 마셨던 게 아니라, 술을 마시고 마음이 쓸쓸해 질때면 안주로 꽉 찬 배를 부여잡고라도 이모네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뻔한 이모의 잔소리에 건성으로 답해가며 펄펄 끓는 뼈해장국으로 속을 지졌다. 그 흔한 동네 친구 하나 없는 이 거대한 도시에서 피 안 섞인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걱정한다는 사실은 퍽 포근했다.
그러고보니 요즘 유튜브에선 친구들끼리 메뉴를 정할 때 밑도 끝도 없이 국밥을 먹자고 우겨대는 이른바 ‘국밥충’들에 관한 풍자가 유행이라고 했다. 툭하면 ‘000보단 뜨끈하고 든든한 국밥을 먹어야지’라는 게 국밥충의 18번이란다. 숱한 겨울을 이모네 뼈해장국과 한병의 막걸리로 난 나였기에, 내 친구들도 나를 국밥충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모의 잔소리는 정말 ‘뜨끈하고 든든’했고, 나는 그 뜨끈한 잔소리를 뼈해장국 자체보다도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모네 단골이 된지 약 1년쯤 지났을 때였다. 아마 나는 25살이었고, 라면도 밥값이 없어서 먹으면 더 이상 별미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 즈음이기도 했다. 부모님이 생활비를 보내주시긴 했으나 통신비부터 교통비, 교재값, 학원비가까지 충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사흘째 라면 하나와 햇반 하나로 끼니를 때우고, 다음날 아침도 라면으로 때워야 한다고 생각하자 신물부터 일었다. 나는 무슨 용기가 났는지 홀린듯 이모네로 걸어가 뼈해장국 포장을 주문했다.
당연히 내 계좌에 잔고 같은 건 없었다. 주문한 해장국이 검은 봉지에 담겨 나오자 나는 짐짓 주머니를 뒤지는 척하며 연습한 대사를 뱉었다. 어라? 분명히 지갑을 챙겼는데, 따위의 말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화끈거려 오는 볼을 애써 무시하며 당황스러운 체 하는데 이모는 “다음에 올 때 같이내”라며 내 어깨를 두드리셨다. 예상한 답변을 들었음에도 내 민망함은 가시지 않았다. 일말의 자존심이었겠지. 무슨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도 아니고, 21세기 대한민국 수도에서 외상이라니. 치닫는 민망함에 내일 당장 갚겠다고 호언장담을 늘어놓자 이모는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기억날 때 내, 뭐 급하다고”라고만 하셨다. 어쩌면 이모는 그때 이미 내 어설픈 연기를 전부 간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도 이모네서 외상밥을 먹고 알바비가 들어오면 외상값을 청산하는 일이 매달 반복됐다. 매번 민망해하는 나와 달리 이모는 외상값은 돈 생길 때 갚으라는 호걸이셨다. 내 인생은 끝장났다고 확신하던 시절, 외상을 달아놓고 집으로 향할 때면 문득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보란 듯이 이모에게 외상값을 갚기 위해서라도 살아내야 한다는 각오였다. 사지 멀쩡한 20대 청년의 야망치곤 참으로 볼품 없었지만 그것이 그때의 내가 품을 수 있는 의지의 전부였다. 무시로 무너지는 마음에 볼품없는 목발을 댄 나는 그렇게 그 시절을 통과했다. 딱하고 마음 쓰이는 단골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단골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이젠 외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나건만 요즘도 세상이 텅 비어 보이는 날은 이모네를 찾게 된다. 예전처럼 자주 술을 먹지도 않는 내게 이모는 마주쳤다 하면 술 먹지말라 잔소리다. 일손 딸릴 때 밥 먹다말고 서빙해 준 건 다 까먹고 또 잔소린가 생각하다가도, 나의 가장 아픈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은 저런 것인가 생각하면 먹먹해졌다. 그럴 때마다 가슴 한켠이 문자 온 것마냥 징하고 울렸다. 어쩌면 나는 정말 이모네 올 때마다 한 통의 문자를 받아가는지도 몰랐다. 그래, 여기까지 잘왔다, 라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투박한 문자 한 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