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무구한 절대악, 한니발 렉터

영화 <양들의 침묵>

by 시언

모니터 앞에 앉아 그 유명한 MGM 사의 울부짖는 사자 로고를 볼 때만 해도, 영화에 대한 내 기대는 전무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원작인 토마스 해리스의 소설 <양들의 침묵>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호평 일색인 독서평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시시했던 소설이 원작이라니. 조금 김이 빠졌지만 그래도 9점대에 달하는 영화 평점에 한번 더 속아보자는 마음에 도서관 미디어룸을 찾은 터였다. 그래 봐야 개봉한 지 25년 된 옛날 영화에 내가 거는 기대치라곤 ‘원작 소설을 얼마나 잘 구현했는가’ 정도였지만. 허나 이 기대치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저평가된 것이었는지를 영화 <양들의 침묵>은 몸소 증명해 냈다.


오늘의 영화, <양들의 침묵> 안의 한니발 렉터(앤서니 홉킨스 분)’는 모든 도시괴담 속 연쇄 살인마들의 시조격인, 기념비적 캐릭터다.


무차별적인 식인 행위 끝에 체포되어 교도소에 영구 수감된 천재 정신과 의사 한니발 렉터에게 임시 FBI 요원 클라리스 스탈링이 찾아온다. 20대 여성을 납치, 살해한 뒤 가죽을 벗기는 연쇄 살인마 ‘버펄로의 검거를 위한 심리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다.


방탄유리벽을 맞대고 마주한 한니발 렉터는 냄새만으로 그녀의 로션 브랜드를 알아맞히는 동물성과 상류 사회 특유의 고상한 매너, 그녀의 말투와 몸짓 몇 가지만으로 그녀의 성장배경을 파악해내는 지성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호의인지 계략인지 알 수 없는 의도로, 그는 스탈링에게 버펄로 빌을 추적할 수 있는 정보를 넘긴다.


스탈링은 몸을 아끼지 않는 수사 끝에 버펄로 빌을 사살하는 데 성공하지만 렉터는 이미 2명의 경찰관을 살해하고 탈옥한 뒤다. 그 후 스탈링의 정식 FBI 요원 임명식 날, 그녀를 찾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탈옥한 한니발 렉터의 전화. 그는 그 유명한 문장, “have the lambs stopped screaming? (양들의 울음소리는 멈추었나?)”라는 말을 남긴 채 군중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이 영화를 본 횟수도 5번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명대사이다.

감히 말하건대 <양들의 침묵>은 원작을 뛰어넘은 경지에 이른 걸작이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정점에 이른 주연들의 연기력과 사소한 대사들 사이사이에 숨겨진 거대한 복선들은 25년이 지나서도 바래지 않는 전율과 공포를 보는 이에게 선사한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만 해도 폭우가 몰아치는 야심한 밤의 단골 화제는 단연 귀신 이야기였다. 호기심 많은 여고생들이 분신사바를 했다가 한 명씩 저주에 걸렸다는 이야기부터 노스트라다무스에 비할법한 예지력을 번득이는 무명의 무속인 이야기까지. 반드시 친구의 친구가 겪은 ‘실화’ 임을 강조하며 시작하는 초자연적 존재들의 이야기에 우린 전율했다.


헌데 이 심야 괴담의 양상은 최근 몇 년간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바로 이 괴담의 중심이 귀신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의 일화를 골자로 하는 도시 괴담(Urban legend)’으로 옮겨간 것이다.


허나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다. 어차피 재미로 나누는 카더라식의 괴담.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우리와 같은 사람에 불과한 사이코패스보다는 모든 물리법칙을 벗어나 존재하는 귀신들의 이야기가 더 무서워야 맞지 않은가?


귀신 이야기보다 사이코패스들의 이야기가 더 소름 끼치는 이유 중 가장 주효한 것은 바로, 사이코패스들의 ‘무동기성’이다.


그동안 스크린이나 TV에서 보아온 귀신들을 떠올려보자. 하얀 소복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입가. 두려운 행색이긴 해도 그들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다.원한’. 즉 이승에서 품은 독한 원한을 어떤 식으로든 풀기 위하여 그들은 존재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죽어서도 잊지 못할 만큼의 잘못을 저지른 이가 아니라면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반면 한니발 렉터는 다르다. 그의 살인과 식인 동기는 오직 하나, 자신의 쾌락이다. 그에게 간택된 수많은 피해자들은 그에게 어떤 해도 가한 적이 없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그들의 잘못이라면 그저 사이코패스의 눈에 띈 것, 하나뿐이다. , 도시를 활보하는 그 누구라도 한니발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양들의 침묵>이 모든 귀신 영화들을 제치고 공포 스릴러의 제왕으로 등극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다.


요새처럼 푹푹 찌는 더운 날, 엿가락처럼 늘어진 몸과 일상에 짜릿한 전율을 선사하고 싶은 여러분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하지만 경고, 이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한니발은 지워지지 않을 공포의 이미지로 여러분의 뇌리에 문신처럼 영원히 각인될테니 부디 신중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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