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몰락 이후의 첫 번째 표정이다’
- 문학 평론가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중
청춘을 ‘나를 찾아가는 삶의 정점’이라고 정의한다면, 청춘이 지나간 다음의 나날들을 ‘몰락의 과정’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까. 당연하게도 몰락은 처연하고 씁쓸한 무언가 일테지만, 그 몰락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중심부로 뛰어드는 사람을 볼 때 우린, 일종의 숭고와도 같은 감정을 느끼곤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법정 진술로 유명한 프랑스 천재 작가 프랑스아즈 사강이 있다.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되어 법정에 섰을 당시, 그녀의 삶은 몰락 그 자체였다. 수차례의 파산과 이혼, 마약과 수면제 과용 등... 보통 사람이라면 이 중 하나의 이력만으로도 부끄러워 그 순간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고개를 푹 숙이고 말테지만, 사강은 달랐다.
“사람이 꿈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고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나는 인생을 즐겼다. 신나는 일이었다.”
-By. 프랑수아즈 사강
그녀의 목적은 삶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었다. 되려, 그녀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들을 단행했을 뿐이다. 이혼을 하면 행복할 것 같았을 때는 이혼을 했고 마약을 해야만 행복할 거 같았을 때는 마약을 했다. 그 뿐이다. 감히 말하건대 그녀는 몰락을 ‘선택’한 것이다.
법적으로야 사강은 당연히 반성의 기미조차 없는 범죄자에 불과하다. 그걸 부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너만을 삶을 살아내라’는 삶의 윤리적 명령을 잣대로 했을 때, 과연 우리는 사강보다 떳떳할 수 있을까? 우린 그저, 안전한 선택지만을 골라왔을 뿐이진 않을까.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
오늘의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천재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의 실화로서, 내가 되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은 한 남자의 이야기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는 흔히 말하는 ‘약쟁이’다. 마약 없이는 연주를 할 수 없는 그는 빚을 져서라도 마약을 구입하고, 결국 그 빚으로 인한 폭행으로 앞니 전부를 잃게 된다. 트럼펫 연주가 주특기인 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셈.
허나 그는 틀니를 낀 채로 트럼팻 연습을 강행한다. 틀니에 짓눌린 잇몸에서 피고름이 쏟아지지만 그는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트럼펫이야 말로 그가 생각하는 인생의 의미 ‘전부’이기 때문이다. 재즈 없는 자신은 영혼 없는 시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행히 결혼을 약속한 연인 ‘제인’의 격려 끝에 그는 마약도 끊고 자신의 전성기 시절의 연주실력 거의 대부분을 되찾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오르게 된 정상급 무대 백스테이지에서 그는 구토를 반복하며 괴로워한다. 긴장해서가 아니다. 그간 잘 참아왔던 마약의 유혹이 다시 한 번 끌탕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마약의 유혹’은 중독자들이 느끼는 단순한 생리 증상이 아니다. 여기서 마약은 쳇 베이커를 쳇 베이커이게 하는 단 하나의 본질, 완벽한 재즈 연주에 대한 갈망을 상징한다.
[펫, 기획사 사장]“(마약을 다시하면) 모든 게 반복 될 거야. 제인은 자네를 떠날거고 자넨 다시 중독자가 될거고....”
[쳇 베이커]“마약 없는 내 연주는 불완전해. 의미가 없다고.”
[펫]“그럼 연주하지 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야.”
[쳇 베이커]“아니,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재즈뿐이야. 나머지는 의미가 없어.”
기획사 사장 펫은 쳇에게 마약 금단 증상을 완화하는 알약을 마약 옆에 두고 방을 나선다. 그 유명한 매트릭스의 알약 장면이 연상되는 씬이다.
얼마 후 뚜벅뚜벅 무대를 향해 걸어나온 쳇은 수많은 재즈 대가들이 보는 앞에서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선보인다. 헌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약혼녀 제인의 눈에서 핏방울처럼 쓰라린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약혼자는 ‘마약 치료제’로 상징되는 정상적 삶을 버리고 ‘마약’, 즉 재즈 예술인으로서의 자신을 택했다는 것을.
자신이 청혼하며 걸어준 조악한 목걸이를 풀고 공연장을 박차고 나가는 약혼녀를 바라보며 쳇은 덤덤히 공연을 끝낸다. 그리고 마지막, 무수한 박수갈채를 받으며 그는 마이크에 대고 조용히 속삭인다.
“Born to be blue”
#영어에서 ‘blue’는 흔히 ‘우울’, ‘절망‘ 등 감정상태를 뜻하는 색으로 사용됨.
이윽고 ‘이후 쳇 베이커는 유럽으로 건너가 불후의 재즈 명곡들을 남겼다. 허나 끝내 마약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했다.’라는 문구와 함께 영화는 끝난다.
엔딩 크레딧이 거의 다 올라갈 때까지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의자에 붙박혀 있었다. 운동할 때처럼 격렬하게는 아니지만, 귓가에 속삭이듯 또렷한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백스테이지에서야 “재즈를 뺀 내 인생엔 어떤 의미도 없다.”고 말했던 쳇이지만, 그 말이 온전히 사실일리는 없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는 제인을 사랑했고, 마약을 택한다면 그녀가 떠날 것이란 사실도 분명히 알았다. 그 뿐일까, 다시 중독자가 되어 곁에 마약이 없으면 매분매초 불안에 떨어야 하는 미래 역시 그는 예감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약, 즉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유일한 예술인 ‘재즈’를 택한다. 다시 말해, 기꺼이 몰락해 갈 것을 결정한 것이다. ‘문학은 몰락 이후의 첫 번째 표정’이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표현대로라면, ‘Born to be blue’라 읊조리는 에단 호크의 마지막 표정은 문학 그 자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쳇 베이커의 재즈 연주를 들었다. 음악이라면 클래식, 락, 팝송, 피아노 연주곡 등 닥치는 대로 듣는 나였건만, 이상하게도 재즈와는 잘 연이 닿지 않았던 터에 <본 투 비 블루>는 좋은 자극이 되어 주었다. 한동안 글을 쓸 때 쳇 베이커를 듣게 될 것 같다.
이러니 저러니 내 맘대로 영화 플롯을 분석해 놨지만, 사실 <본 투 비 블루>는 수록된 재즈 ost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음악 영화다. 쇳소리 같은 쉰 목소리가 섞여있음에도 묘하게 매력적인 쳇 베이커의 목소리를 에단 호크는 더할 나위 없이 충실히 표현했다.
구제불능의 문제아가 어떤 계기를 통해 차차 성장해 간다는 식의 클리셰적인 성장 영화에 지치신 여러분, 그리고 관능적인 듯 처연한 듯 묘한 재즈 선율에 젖고 싶은 여러분께 오늘의 영화 <본 투 비 블루>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