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레기’란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저널리즘의 수준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기자로서의 전문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사람과 그 사회적 현상을 지칭한다.
- 출처 : 위키백과
이른바 기레기의 시대다. 고질적인 병폐로 꼽혔던 언론사 간의 특종 경쟁은 세월호 생존 자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플래시 세례로 이어졌다.
온라인 기사는 기사 읽는 시간보다 광고창 끄는 시간이 배로 오래 걸리며, 유부남 영화감독과 여배우와의 스캔들 보도는 관련 문자 메시지 하나만 추가입수해도 ‘단독’ 헤드라인을 내걸기 바쁘다. 2016년 현재, 기자를 명예로운 직업이라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늘의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카톨릭 성직자 아동 성추행 사건을 파헤치는 보스턴 스포트라이트 팀(특종 팀)의 치열한 조사 과정을 통해, 언론인이 가져야 마땅한 고귀한 사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보스턴 지역 신문사 ‘보스턴 글로브’에 새로운 편집장 ‘배런’이 부임해 온다. 그는 신문사의 부서 중 기획 보도 전문인 ‘스포트라이트 팀’에 몇 년 전 일회성 보도에 그쳤던 ‘카톨릭 신부 아동 성추행 사건’ 추가 조사를 지시한다. 그리고 조사에 착수한 지 단 며칠만에 믿기 힘든 추악한 진실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한다.
보스턴 전체 성직자의 6%, 약 90명이 소아 성추행을 행한 증거와 신부들이 범행 대상을 고를 때 자신에게 의지하기 쉬운 저소득층, 편부모 가정 아이만 선택해온 사실을 알고 스포트라이트 팀은 경악에 빠진다. 하지만 편집장 배런과 팀장 로비는 추가조사를 결정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단독이니 특종이니 하는 명성이 아니다. 그들이 특종 기자로서의 명성을 원했다면 ‘단독’ 헤드라인 두 글자 박은 채 보도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90여명의 사제가 성추행을 저지른 사실을 보도한다 해도, 결국에는 사제 개개인의 일탈로 마무리 될 것을 로비는 잘 알고 있다. 로비가 원하는 건 썩어빠진 교회사회의 뿌리를 뒤흔들 수 있는 보도, 즉 교회 체계 자체에 대한 고발이다.
스포트라이트 팀의 치열한 조사 끝에 결국 일선 성직자들의 소아 성애를 교회 상부에서 알고도 모른 채 해왔음이 밝혀지게 된다. 기사가 보도된 후, 편집장실에 모여 그간의 노고에 대한 덕담을 나누는 와중에 스포트라이트 팀장 로비는 조사 중 알게 된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로비는 수년전 성추행 사건 관계자 중 하나가 신문사로 성추행을 저지른 신부들의 명단을 보내왔다는 사실과, 당시 그 명단을 무시한 게 자기 자신이었음을 고백한다. 자기만 입 다물고 있었다면 아무도 몰랐을 작은 해프닝을 그는 어째서 털어 놨을까.
그러나 우산대로 /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 우리들의 옆에서는 / 어린놈이 울었고 / 40명가량의 취객들이 / 모여들었고 / 집에 돌아와서 /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 아는 사람이 /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김수영 전집』, 시 <죄와 벌> 중
김수영의 <죄와 벌>이란 시에는 제목과는 달리 가정 폭행범의 죄상만 낱낱이 기록되어 있을 뿐, 벌로서의 행위나 반성은 보이지 않는다. 김수영의 벌은 어디 있을까.
김수영이 자신에게 가한 벌은 ‘치부로 가득한 시를 발표한 것’ 그 자체다. 그는 아내를 길거리에서 폭행한 자신의 행태를 공개함으로서 그 어떤 반성보다 지속적인 벌을 자신에게 내렸다. 다시는 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개선 의지가 없고서야 불가능한 행동이다.
로비의 고백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사회의 악을 고발하고 있지만, 자신 역시 추악한 범죄의 방관자에 불과했다는 그의 씁쓸한 고백에서 우린, 다시는 방관자가 되지 않겠다는 독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사실 이 영화는 비현실적일 만큼 이상적인 캐릭터들로 가득하다. 당장 성추행 사제들의 명단을 공개할 것을 주장하며 팀장 로비와 대치하는 팀원 ‘마이크’ 역시 개인적인 영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마이크가 굵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팀장에게 반항하는 이유는 단 하나, 정의감에 기반한 선한 분노 때문이다. 세상에 악인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자신들에겐 그들을 처벌할 힘이 없다면, 최소한 그들의 악행을 만천하에 알리기라도 해야 한다는 선한 분노.
그의 분노가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건 마크 러팔로의 연기가 부족해서가 아닐게다. 단지 우리가 너무 멀리까지 왔을 뿐이다. 정의, 도덕, 양심과 같은 초심의 단어들로부터 우리 모두, 너무 멀리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배경이 실화라는 사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희망을 갖게 한다. 손 쓸 수 없이 썩어빠진 듯 보이는 이 사회 어딘가에서, 아직 정의감을 잃지 않은 누군가가 분주히 투쟁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작고 단단한 희망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