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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Sep 12. 2016

<네가 잃어버린것을 기억하라>;낯선 여행지가 주는 위안

정착민의 삶에서 유목민적 삶으로


저자 김영하

출판사 랜덤하우스


아니야지겨움 때문이야.....(중략).... 반환점을 돌아서 얼마간 그동안 그랬듯이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거야이 길이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끝나리라는 걸그 사람도 그런 게 지겨워서 자살했을 거야.’

                                                                                                                -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68p


 인간은 이상한 존재다. 불안정한 나날이 계속될 때에는 안정을 갈구하지만평온한 나날이 이어질 땐 권태에 몸부림치는 게 인간이다.


 온종일 일과 사람에 치이다 돌아온 원룸 자취방잠들기 전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침대에 걸터앉았을 때 그는 깨닫는다어제도 이랬고저번 달도 이랬으며다음 달도 이러하리라는 어떤 예감문득 그는 사는 게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권태가 나를 옭아맬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다양하다누군가는 마음만 먹고 있던 독서를 시작하고누군가는 헬스클럽 회원권을 갱신하며또 누군가는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나는 오랫동안 정착민으로 살아왔다...(중략)... 떠나기로 마음먹은 후나는 천천히 집 안의 모든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먼저 책들을 헌책방에 내다 팔기로 했다책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책을 팔자니 속이 쓰렸다그러나 언제까지 저 줄어들 줄은 모르고 오직 늘어나기만 하는 무시무시한 책들을 껴안고 살 수는 없었다.’

                                                                                                            -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29p


 평단이 인정하는 소설가 겸 교수였던 저자는 정착민의 삶에 권태를 느끼고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결정한다


 유목민의 윤리는 가벼움이다. 계절 변화에 맞춰 새로운 목초지로 떠나야 하는 유목민들에게 생필품을 제외한 모든 것은 짐에 불과하다최소한의 짐만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는 유목민들이기에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바람이 머물다 간 듯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아마 김영하가 동경했던 유목민의 삶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오늘의 책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유목민의 삶을 선택한 한 소설가의 시칠리아 유랑기다.


낯선 도시은퇴한 노인들만 앉아있는 옹색한 서점입에 맞지 않는 음식그리고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무의미그러나 생소한 곳에서 영혼은 비로소 눈을 떠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내려다본다.

                                                                                                              -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28p


 보통의 여행은 명승지에서 시작해 명승지로 끝난다. 당연한 일이다체류일은 길어야 일주일 남짓인데 가봐야 할 명소는 수십 개를 넘어가니까결과적으로 여행자들은 휴식을 위해 떠난 여행 내내 새벽같이 일어나 수십 개의 관광명소에 출석하기 바쁜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다.


낯선 것과의 조우에서 이성이 시작된다.’

                                                                                                                             - By.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여행의 동기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내가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나 자신을 생소한 환경에 던져놓기 위해서다익숙한 환경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생각이란 쉽게 말해 고만고만하다매일 자던 침대에서 일어나 매일 쓰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매일 타는 지하철을 타는 생활에서 참신한 자아성찰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고만고만한 생각들을 머리에 이고 사는 생활이 패턴화 될 때권태는 고개를 든다.


 이런 문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여행이다. 그래서인지 난 다른 이의 여행기를 읽을 때도 관광 명소에 대한 서술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여행기에서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 건 낯선 환경에 놓인 저자가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 지난 날의 성찰이나 반성이다김영하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리는 작품이다.


시칠리아 산골의 한 농장이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려 주었던 것이다. 쓸모 있는 작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메마른 구릉과 고립된 작은 집관목 숲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도살과 죽은 개의 저주지독하게 캄캄한 밤과 요란한 아침밤새도록 이어지는 무서운 꿈과 그보다 더 무서운 추리 소설들그랬다나는 그런 곳에서 자랐고 지금의 나를 만든 그 무엇인가의 일부는 거기에서 왔음이 분명하다.

                                                                                                         -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167p


  숨겨진 나를 만나는 시간은 여행사 팜플랫에서 묘사하듯 생기발랄한 무언가는 아닐 것이다낯선 여행지 어딘가에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미소를 짓느라 감춰왔던조금은 낯선 저마다의 자신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던 나의 면면들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요새는 위로(危路)라는 말보다는 위안(慰安)이라는 말에 더 정감이 간다위로가 타인으로부터 선물 받는 수동적인 무언가라면위안은 어떤 대상을 접한 후 내 안에서 싹트는 나로부터의 위로멘토와 멘토들의 위로가 넘쳐나는 시대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낯선 여행지에서 나 자신과 대화하면서 받는 저마다의 위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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