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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Oct 11. 2016

영화 <보이후드>;소년이 어른이 되기까지

시간이란 이름의 마법


'소설가는 인생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자기가 소설로 쓸 수 있는 인생에 관심이 있다.'

                                                                                             - 김영하너의 목소리가 들려』 


 소설이란 인생 그 자체일까나의 대답은 'NO'영화 역시 마찬가지. '소설 같은혹은 '영화 같은'이란 표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영화가 인생 그 자체라면 우린 매일같이 절세미녀(혹은 미남)와 부딪혀 들고 있던 커피를 쏟기 바쁠 것이다이 논리 대로라면 커피를 못 마시는 나는 애당초 영화 같은 인생을 살긴 글러먹은 셈이다.


 영화는 우리네 인생의 어떤 지점들을 닮았을 뿐이다우리가 매일 영위하는 일상의 대부분은 예술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러닝타임 내내 아침에 일어나 애들 학교 보내고 설거지하고 빨래를 개고 다시 저녁을 차린 후 잠자리에 드는 주부의 하루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영화는 내가 알기론 아직 없다


  지금껏 영화감독들의 앵글은 대부분 삶의 '사건'들을 비춰왔다. 모범생일 것을 강요받는 학생들 앞에 나타난 문제 선생이라던가(<죽은 시인의 사회>), 자국 국민들을 '돼지'라 우롱하며 부패를 일삼는 사회 상류층들(<내부자들>)이 지금까지 영화감독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영화적인 것=사건'이란 견고한 공식은 언제나 실패하지 않는 영화 문법 중 하나였다매일이 비슷한 일상에 찌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드라마틱한 서사를 찾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보이후드>는 다르다. <보이후드>의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사건이 아닌 '시간의 흐름자체에 주목했다그는 총 12년 동안 같은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찍었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여덟 살이던 꼬마 배우는 18살의 청년으로 변했다어쩌면 우리네 삶은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그 자체일 뿐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싶던 걸까.


 "아빠, 세상에 마법이란 건 없는 거지?"


 아직 환상을 믿어도 좋을 나이의 '메이슨'은 동화 속 마법이 어른들이 만들어 낸 허구임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렸다술에만 취하면 집안 물건들을 부수는 양아버지와 학위 취득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엄마반복되는 이혼과 재혼... 어린 소년이 홀로 감당하기에는 그를 둘러싼 현실들이 뭐랄까... 너무 현실적이다.



 기존 영화의 문법대로라면 '사건'이 등장할 타이밍이다시련에 빠진 주인공을 전과 다른 누군가로 탈바꿈시킬 일말의 사건아무도 몰라주는 소년의 냉가슴을 따스히 품어주는 담임 선생님이 등장할 수도 있고분열된 가족이 뜨거운 눈물과 함께 화합의 장을 열 수도 있다나 역시 어느 타이밍에 어떤 사건이 등장할 것인지를 점쳐보며 사건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하지만 감독은 관객들의 선입견을 예상한 듯, 그 어떤 영화적 사건도 보여주지 않는다. 계속되는 엄마의 이혼자신을 별종이라고 비웃는 학교 친구들... 기존 영화였다면 소년의 세계관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을법한 사건들이 <보이후드>에선 그저 흘러 지나가는 일상에 불과하다반대도 마찬가지유일하게 고민을 털어놓는 친아버지와의 대화도 메이슨의 인생을 뒤바꾸는 사건으로 작용하진 않는다그저 시간은 흘러가고소년은 성장해 간다그게 좋은 것이든나쁜 것이든 말이다.



 

 한때 프로이트의 트라우마론을 신봉했던 적이 있다. 좋든 싫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트라우마적 사건과 직면하기 마련이고그러므로 현재의 내 성격과 상황은 이미 다 정해져 버렸다는 식의 사고방식에 나는 매료됐다어디서부터 꼬인 건지조차 알 수 없는 내 삶을 명확히 설명해 주었으니까삶에 불만이 많았던 내게 트라우마 이론은 좋은 핑곗거리가 돼주었다. 


'현재 대학에 존재하는 모든 학과들의 지식을 총동원해야만 한 사람을 겨우 설명할 있습니다그의 소비 패턴은 어떤지성격은 어떤지언어 습관은 어떤지... 인간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 철학자 강신주


 한 인간은 그가 겪어온 사건들 몇 가지로 설명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내 안의 무언가를 영영 뒤바꾸는 건 맞지만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나는 나다여전히 태양은 뜨고나는 밥을 씹어 삼키고 잠을 자야 한다결국나는 나로서 살아내야만 한다.


 소년을 어른으로 만드는 게 사건들이 아니라면소년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른이 되는가답은 '시간'이다. 흘러가는 시간은 유속이 느린 강물처럼 천천히 우리를 다른 어딘가로 실어 나른다시간의 나룻배에 올라탄 우리는 그저 그런 일상들을 겪어내면서때론 원치 않는 사건들과 마주하면서천천히 변화해 간다성장이란 그런 모습으로 존재한다



 결국, 마법은 있다상처 많은 소년이 어른으로 변해 가는 시간의 마법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깃들어 있다지독히도 아팠던 지난날을 과거로 떠나보내면서, 눈이 시리게 행복했던 기억들을 추억으로 보존시키면서시간은 소년을 한 명의 어른으로 빚어낸다.


지속되는 모든 삶은 위대하다


영화 <보이후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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