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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집

자존감에는 근거가 필요하다

낡은 운동화에 대한 단상

by 시언


"아직도 뛰어? 대박이네..."

캠퍼스 축구장을 12바퀴째 뛰고 있을 무렵, 벤치에 앉아있던 여자 한 명이 중얼거렸다. 대박이라... 귓가를 가득 메운 숨소리를 뚫고 들어온 타인의 감상평은 묘한 감상들을 불러일으켰다. 대체 뭐가 대박이라는 걸까?


그날은 기숙사 측에서 헬스장 러닝머신을 단체로 점검했던 날이었다. 뉴스에선 이상 한파를 예고하며 외부활동을 자제할 것을 강조했고, 내겐 보온 기능을 지닌 운동복이 없었다. 땀이 마르면 체온이 급감할 텐데... 감기 기운도 아직 남았고.. 운동화도 그물망이라 발 시릴 거고... 늘 그렇듯, 오늘 달리기를 쉬어야 할 이유들이 랩 가사처럼 구구절절 이어졌다. 매일 하는 생각이지만, 운동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처럼 매번 설득력 있기도 쉽지 않다. 난 옷장에 박아둔 티셔츠와 후드티를 껴입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뛰고 생각하자"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하여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내겐 칭찬이 과한 친구가 한 명 있다. 같은 생활관 선임이기도 했던 친구는 제대 후에도 나의 지성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너처럼 똑똑한 애가 고시를 공부해야 되는데... 니 머리면 작가를 해도 성공할 거다... 너 정도 성격이면 뭐... 아무에게나 칭찬을 남발하는 친구가 아니었기에 나는 더욱 당황했다. 겸손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당황했던 이유는, 정작 나 자신은 내 정신이나 성격을 좋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내 머리는 사소한 사건 앞에서도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들먹이며 비상등을 울려댄다. 신경을 긁어대는 시나리오 중 개연성이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불안의 시나리오 작성을 멈추지 못했다. 내 생각에 익사당하는 것 같은 나날들이 늘어갔다. 그리고 이 고통은 타인과는 소통될 수 없는 나만의 것이란 사실이 나를 더욱 지치게 했다. 생각이 너무 많은 누군가를 동정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까.


나와 달리 대범하고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자괴감이 들끓었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아버지를 닮지 못했을까.. 자괴감은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자기계발서를 싫어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내가 알려줄 비밀 하나면 너의 인생도 고속도로처럼 뻥 뚫릴 거라는 그들의 확신은 불쾌했다. 당신들이 뭘 안다고. 자기계발서 저자들은 대부분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생각을 자주할 것을 요구했다.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면 행동이 긍적으로 변하고, 마침내 인생까지 변화한다는 그들의 논리는 나의 현실과 맞물리지 않았다. 늘 그렇듯, 세상은 매끈한 논리대로 설명되어지지 않았다. 생각만으로 인생이 변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1년 전부터 내 책상 앞 벽면에는 낡은 쪽지 하나가 붙어있다. Anima Sana In Corpore Sana.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뜻의 라틴어 경구를 알게 된 날부터, 나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타고난 정신이 피곤하게 생겨먹었다면, 그 정신을 견딜 체력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절실함 때문이었다.


왜 하필 달리기였냐는 한 후배의 질문에 나는, 체력에 관해 아는 운동이라곤 달리기 뿐이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정말 그랬다. 하버드 의대를 비롯한 서구 의학계에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 신경증에 달리기 처방을 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시간이 얼마쯤 지난 후의 일이었다.


달릴 때라곤 수업에 늦었을 때뿐이던 평범한 대학생에게 러닝머신 위에서의 시간은 지옥 그 자체였다. 달린 지 5분이 지나면 거칠어진 호흡으로 목 주변 근육이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10분이 지날 즈음이면 예전에 다쳤던 양쪽 종아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러닝머신에 면해있는 대형 창 밖으로는 또래 남녀들이 담소를 나누며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유리창은 내게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세포막처럼 느껴졌다.



3.798km와 5.4km. 30분 동안 1.6Km를 더 달리게 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전문 러너 입장에서야 둘 다 우스운 기록이지만, 20분 동안 안 쉬고 뛰어보는 게 유일한 꿈이던 저질 체력에게 5.4km는 작은 기적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다리 통증으로 오래 걷는 것조차 힘들 때도 이 악물고 러닝머신 위에 올랐고, 땀에 절어 고장난 이어폰이 어림잡아 5개는 되었다. 게을러빠진 내 어디에서 그런 근성이 나왔을까. 그만큼 나는 절박했던 걸까. 돌이켜봐도 신기하기만한 1년이었다.


안 쉬고 30분을 질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이나 그 후나, 나는 여전히 나였다. 여전히 내 머릿속은 개연성 없는 생각들로 복작거렸고, 달리기는 여전히 귀찮고 힘든 무엇이다.


그렇다면 1년간의 달리기는 내게 무엇을 남겼을까. 4칸이 줄어든 벨트 구멍? 동네 야산 정상까지 뛰어오를 수 있는 체력? 전역 직후와 같아진 옷 치수? 1년 간의 달리기가 내게 남긴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삶의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는 확신'이었다. 나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매일 낡아빠진 운동화의 끈을 묶으며 재확인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겐 아버지의 삶이 있고, 내게는 내가 걷는 삶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달리고 있는 한 내 삶은 내가 주도한다는 확신. 그것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 상상해보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 그저 아찔할 뿐이다.

1년 전 구입한 흰색 러닝화는 뒷창이 닳아 구멍이 뚫렸다

나는 좋은 생각만으로 자존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내가 경험한 인생은 마음먹는 것만으로, 좋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달라질 만큼 손쉬운 것이 아니었다. 땀 흘려 몸을 움직이고, 그 행동을 충분히 지속하는 것. 나를 존중하는 마음은 추구하고 지속하기를 멈추지 않은 내 자신을 자각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자존감에도 근거가 필요하다. 자기를 존중하고 싶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좋으니 그에 합당한 근거를 만들어가는 일부터 시작하라고 나는 말해주고 싶다.


P.S : 지속적인 달리기가 정신 건강에 미치는 효과는 하버드 의대 존 레이티 교수의 『운동화 신은 뇌』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달리기에 앞서 동기부여가 필요하신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표지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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