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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집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혼자 골목을 걷고 있으면

by 시언

오늘도 대로에는 사람이 많다. 웃는 사람, 무표정한 사람, 바쁜 듯 종종걸음 치는 사람.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어깨들이 성가시다. 지방에서 대학을 마친 여자 동기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러시아워에도 텅 빈 거리를 보면 권태가 죽음처럼 밀려온다고 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밀실에 있을 땐 광장이 부러웠고, 광장에 있을 땐 밀실이 간절했다. 서울살이 7년 차에도 나는 결국 적응하지 못했다.


북적이는 거리를 피해 한적한 외길로 들어선다. 철가방을 매단 오토바이와 따분한 얼굴로 잡지를 뒤적이는 카페 주인의 얼굴이 정스럽다. 대로의 풍경은 다 거기서 거기지만 한적한 골목의 풍경은 선명하다. 찻잎처럼 우러나는 단상들을 곱씹으며 골목을 걷는다. 고향에 온 듯 편안하다.


이사를 많이 다녔다. 타지 출신 자취생의 팔자가 그렇듯, '가성비' 좋은 집을 찾아 전전했다. 반지하도 있었고 고시원도 있었고 옥탑방도 있었다. 전전하는 생활의 시작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시골 본가와 학교 간 통학이 불가능했으므로 불가피했다. 조용한 사색이 시골 전원의 특권이었음을 곧 깨달았으나 돌아갈 길은 없었다. 애인의 얼굴에서 전 애인을 찾는 남자처럼 나는 이사 온 동네마다 한적한 골목길을 찾아 헤맸다. 작가 김영하는 "왜 멀리 떠나가도 달라지는 게 없을까"라고 썼다. 타당한 문장이다.


애인들은 골목으로 향하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볼 것도 없는 골목을 왜 자꾸 가냐는 것이었다. 볼거리가 많으면 네가 가려 보이지 않아 싫었다. '진짜 사랑은 같은 곳을 함께 보는 것'이라던 명언 구절이 떠올랐다. 보고 싶은 건 '곳'이 아닌 '너'였다. 내가 사랑하는 것도 너였으므로, 우리는 골목 대신 대로를 더 자주, 오래 걸었다.


술을 마시고 돌아온 날에는 두 정거장 전에 내려걸었다. 걷지 않고 잠자리에 든 날의 숙취는 길고 독했다. 폭죽처럼 화려했던 밤을 끝내는 의식이었다. 대로는 텅 비어있었으나 굳이 나는 골목으로 드러 섰다. 불 꺼진 간판과 원룸 창문에 매달린 담배 불빛을 보며 내일의 할 일을 정리했다.


문득 산책이 습관이 된 건 어른이 된 이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들의 일일(一日)이 그때 꿈꿨던 그대로였다면 나는 골목을 사랑하지 않게 됐을까. 아마 그럴 것이었다. 동물이 제 상처를 핥듯, 내게 산책은 구르고 깨지며 생긴 상처를 돌보는 시간이었다. 입은 상처가 아파서, 다시 상처 입을 게 두려워서 다들 이 난리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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