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으로 간 남자
1750년 7월. 자식들은 엄숙한 얼굴로 아버지의 침대를 에워쌌다, 그 중 한 명은 방 안에 놓인 피아노를 연주했다. 침대 위 남자의 이름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훗날 교과서에 '음악의 아버지'로 기록될 남자였다. 바흐는 부드러운 침대 매트리스에 몸을 누인 채 임종 직전의 찰나를 음미하고 있었다. 북받치는 슬픔에 손이 굳어 버렸을까. 아버지의 작품의 연주하던 아들은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뗐다. 바흐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아들이 중단한 연주곡을 마무리했다. 마무리되지 않은 선율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뭐든 제대로 끝내놓고 봐야한다는 강박. 인류에 족적을 남길 천재라면 그 정도 완벽주의는 가져야겠지. 수분이 과한 물감처럼 번지는 버스 밖 풍경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다음 정류장은 통영, 통영입니다"
여행을 '시도'한 건 이번이 두번째였다. 저번 시도는 2011년 6월, 전국 대학가에 유럽여행 붐이 일었을 때였다. 방학이 시작되면 친구 10명 중 2명은 메신저 프로필을 유럽 도시 사진으로 바꿨다. 방학 끝자락에 귀국한 그들은 독일 맥주가 얼마나 진했는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개선장군처럼 읊어댔다. 나는 당시 베르사유 궁전을 비롯한 파리(PARIS)에는 하수 시설이 없었으며, 베르사유 정원은 볼 일 급한 귀족들의 화장실이었다고 비아냥거렸다. 하이힐 역시 그들이 싸놓은 오물을 덜 밟기 위해 발명되었다는 사설도 잊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은 좋은 안주거리가 되주었다. 그러나 귀국한 친구들의 황홀한 눈빛과 손짓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진정 매혹된 자는 눈과 귀가 먼다는 것을 나는 그 친구들에게 배웠다. 그 매혹이 부러워서, 나는 20만원가량을 유럽 여행경비로 모았다. 지금은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마무리되지 않은 나의 첫번째 선율이었다. 바흐가 들었다면 무덤에서 일어나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놀랄 것도 없지. 난 늘 어중간하니까.
터미널에 발을 딛자 남도의 열기가 몸을 감쌌다. 영화였다면 잔잔한 OST와 함께 활기 가득한 터미널의 풍경, 기대감에 몸이 근질근질한 주인공의 얼굴이 차례로 비춰질 터였다. 현실의 통영은 덥고 습했다. 어제 전국적으로 비가 왔고, 오늘은 일교차가 크니 주의하라던 기상 캐스터의 멘트가 그제야 생각이 났다. 팔뚝에 땀방울이 맺히는 걸 보고 있으니 후회가 솟구쳤다. 그러게 자취방에 박혀서 예능이나 볼 것을... 흐릿해지는 기차의 뒤꽁무니를 나는 한동안 응시했다. 기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허기가 밀려왔다. 나는 정류장 인근 국밥집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들어갔다. 국밥은 어디든 늘 평균은 되니까. 밥을 먹어야 돌아가든 여행을 하든 할 수 있다.
"어서와요 학생, 학생도 여행 왔나봐. 대학생?"
"네? 아 네네,"
"여긴 굴국밥이 잘 나가. 편한데 앉아요"
여주인이 발 빠르게 밑반찬을 날랐다. 김치와 무생채, 콩나물무침, 소금과 후추가 놓였다. 일용직 노동자로 보이는 두 남자가 앞자리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국밥을 기다리며 나는 통영 관광 팸플릿과 서울행 버스 시간표를 번갈아 읽었다. 이윽고 펄펄 끓는 국밥이 나왔다. 크고 작은 굴이 어림잡아 20개는 돼 보였다. 들끓는 기포에 밀려 쪽파 조각이 그릇을 넘었다. 서울이었다면 15,000원은 받아야 마땅할 푸짐함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나를 보며 주인이 말했다.
"좀 많아요? 통영이 다 좋은데 관광지들이 다 좀 떨어져 있거든. 하루종일 걸으려면 배고파서 안돼. 간은 돼있으니까 소금은 먹어보고 넣고."
국물은 맑고 시원했다. 탁하고 무거운 서울의 순대국과는 결이 달랐다. 함께 나온 쌀밥을 말아 정신없이 숟가락을 놀렸다. 도저히 비울 수 없을 것 같던 그릇이 바닥을 드러내 보였다. 앞머리는 땀에 젖어 이마에 눌어붙었고 등판의 티셔츠도 축축히 젖었다. 수저를 놓고 의자에 기댔을 때, 문득 끝까지 가보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바흐나 유럽 다녀온 친구들처럼 고상하고 고고한 선율은 아니겠지. 땀냄새가 진동할 것이고 자려고 누운 찜질방은 아저씨들의 코고는 소리가 쩌렁쩌렁할 것이다. 여행이 끝난 후 남는거라곤 몇 장의 사진과 피곤에 절은 몸뚱아리가 전부일지도 모른다. 역사에 남긴커녕 1년후면 나조차 잊을만큼 사소한 경험이겠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누가 역사에 남으래? 중요한 건 각자의 연주를 끝마치려는 의지다. 나의 두 번째 연주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찬물로 입안을 헹구며 나는 서울행 버스 시간표를 가방 밑바닥에 쑤셔 넣었다. 두번째 선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