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과, 그런 인연이 되어줄 수 있는 나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대학 신입생 시절, 교양 강의에서 친해진 형들과 술을 마시던 중 함께 있던 M형이 심리 테스트를 제안했다. 당시 입대를 앞둔 나는 '군대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형들의 군대 특강만 아니라면 뭐든 대환영이었다. 얘는 육군을 가야 한다 공군을 가야 한다 격론 중인 형들을 뒤로한 채 M형이 읽어주는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넌 지금 사막에 있어. 모래와 선인장 몇 개밖에 없는 사막. 이 사막에 말 한 마리가 있어. 이 말의 모습이 어떤지 생각나는 대로 설명해봐. 너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던지... 생김새는 어떤지...'
형의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내 눈 앞에 펼쳐진 이미지는 '우아한 백마'였다. 부드럽게 휘날리는 갈기와 햇빛에 닿아 빛나는 살결. 아름다운 백마는 힘차게 모래를 박차며 달려오고 있다. 너무 멀어서 보이는 거라곤 들썩이는 머리뿐이었지만 말은 분명히 내게 달려오고 있었고, 나 역시 백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내 묘사를 들은 형은 들고 있던 질문 해설지를 쓱 훑어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넌 앞으로도 외롭겠다..."
"왜요?"
"이상형이 이렇게 확고해서야 연애하겠니."
해설지는 내 답변이 아름다운 이성을 꿈꾸는 유형에 속한다고 적고 있었다. 말의 생김새를 세세하게 묘사할수록 '이상적인 이성관'이 확고한 사람이며, 말과의 거리가 멀수록 주변 이성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형을 바라보자 형은 다시 한번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킬링 타임용 테스트 따위가 내 앞날을 예견할 수 있을 리 없다고 너스레를 떨며 나는 반잔쯤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미지근한 소주는 유난히 썼다.
어쩌면 그 날 이후로 한동안 내 생활은 '증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막 성인이 된 남자들이 그렇듯, 나 역시 남자로서의 매력을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매일 운동을 하고, 출석하듯 술자리에 나가고, 독서 토론 등 여러 모임들을 바지런히 쫓아다녔다.
20살부터 5년간 총 두 번의 소개팅을 했고, 두 번 모두 연애로 이어졌다. 연애로 발전하진 못했지만, 고백 비슷한 걸 받은 적도 있었다. 친구들은 이를 두고 마성의 남자네 치명적이네 농담을 해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나는 그저 민망할 뿐이었다. 떠나보낸 연인들에게는 좀 더 헌신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마음을 표현해 준 사람들에겐 오해하게 만든 점이 못내 미안했다. 1년 전, 마지막 연애를 끝내면서 나는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외로움을 변명삼아 연애를 시작하지 않을 것"
나는 외로움이 많은 사람이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한 자취방 살이는 내게 외로움이라는 그림자를 남겼다. 먹을 사람이라고는 나뿐인 밥상을 차리는 게 싫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주말이면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을 때만은 혼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
돌이켜보면,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기보단 외로움을 어떻게든 해소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턱 밑까지 차오른 외로움을 덜어내고 싶다는 절박함이 선행했고, '적합한' 사람을 찾는 일은 그다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누린 몇 안 되는 행운이었다.
요즘 학교 캠퍼스 뒷길에서 산책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목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극한까지 나를 몰아붙여야 하는 헬스와 달리, 산책을 할 땐 수면 위로 떠오른 상념들을 조용히 관조할 수 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데 20분쯤 걸리는 짤막한 산책로를 걸으면서 하루의 생각들을 정리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산책로가 학교 내에서는 유일하게 으슥(?)한 곳이라는 점이다. 밤 11시쯤 산책로를 걷고 있으면 서로 얼굴을 포갠 채 한 몸이 되어있는 커플들과 꼭 한 번은 마주치게 된다. 지나가는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는 커플도 있고, 지나가든지 말든지 오롯이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커플도 있었다. 내겐 그저 조용한 산책로에 불과한 길이 어떤 이들에겐 사랑의 밀회 장소가 되는 사태가 나는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그들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기면 가슴속 외로움들이 성난 시위대처럼 몰려왔다. 인연을 기다린다고 좋은 사람이 제 발로 걸어오겠냐던 친구의 잔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 정말 나는 형의 말대로 실재하는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한 백마를 쫓고 있는 걸까, 나를 들볶는 외로움의 비난은 집요했다.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m no longer young and beautiful?
[내가 더 이상 젊고 아름답지 않아도 나를 사랑해 줄 건가요?]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 got nothing but my aching soul?
[내게 남은 건 상처 입은 영혼뿐 일 때도 나를 사랑해 줄 건가요?]
- Lana Del Rey, ≪Young and beautiful(영화 위대한 개츠비 OST≫ 중
결과적으로, M형의 예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는 여전히 인연을 기다린다. 이 부분에선 형이 옳았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게 사람 생각이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다 경험이다'는 명목 하에 연애 상대를 애타게 찾아다니는 일은 없을 듯하다. 미래의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예감을 위해 있지도 않은 지금의 사랑을 지어내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반면 나의 이상향이 '아름다운 이성'을 향해있다는 부분에선 형이 틀렸다. 연인의 외모야 내 눈에만 매력적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연애는 남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내가 기다리는 인연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틀리게 된 예측도 있다. '넌 앞으로 외롭겠다'는 부분이 그렇다. 20살의 내가 느낀 외로움이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면, 지금 나의 외로움은 나의 '선택'에 더 가깝다. 외로움으로 섣불렀던 연애를 변명하지 않겠다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 외로울 것을 선택한 셈이다. 내가 외롭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그리 되는 것도 아닐 테지만, 좋은 인연을 만나는데 얼마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철학자 니체는 함께 할 상대를 고를 때 오직 '긴 시간 동안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인가'만을 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체가 말하는 '대화'는 여러 감정 상태를 포괄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는 물론, 권태롭거나 절망스러울 때 거리낌 없이 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 내가 기다리는 건 그런 인연과, 그런 인연이 되어줄 수 있는 나 자신이다.
20살 때 보았던 백마는 지금 어디까지 왔을까. 다가오고 있을까, 되려 멀어져 버렸을까. 무지한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고, 나는 오늘도 혼자 산책을 다녀왔다. 보름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 <표지 사진 출처=Glister>
P.S
M형, 형 취업하셨다고 한 수원에 셋이 모여서 술 한잔한 게 벌써 2년 전이네요. 잘 지내시나요?
형이 심심풀이로 해주신 심리 테스트는 이상하게도 5년이 지나도록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더군요. 아 물론 나쁜 뜻은 아닙니다. 뭐랄까..일종의 화두였달까요.
이렇게 글 쓴 김에 보고싶은 마음이 들어 주절거려 봅니다. 언제 한번 다시 모여 쌓인 이야기 나누면 좋겠네요.
좋은 화두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뵈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