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아직 개봉 전인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 줄거리를 어디까지 언급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브런치 측에서 시사회 참석과 리뷰를 요청한 건 제 문체로 쓰인 <컨택트> 비평을 보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평소 제 스타일대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이 글을 읽지 않으시는 걸 권장합니다.
'외계인 나오는 SF영화'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기상천외한 신무기로 인류를 공격해오는 외계인과 그에 맞서는 인류의 총공세 같은 장면들. 영화 <컨택트>의 예고편을 본 나도 그 일반인들 중 하나였다. 예고편에서는 '언어'나 '소통' 같은 단어들을 강조하려 애쓴 티가 역력했으나 선입견에 사로잡힌 나로선 끝내주는 전쟁 씬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나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단, 영화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으로 내 기대를 저버렸다.
영화는 주인공 '루이스(에이미 아담스 분)'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어린 딸과 보안관 놀이를 하는 루이스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회상의 끝에서 영화는 루이스의 딸이 손쓸 수 없는 병으로 단명했음을 암시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상실'을 전제하고 있다.
세계 각 12곳에 착륙한 미확인 비행물체 '쉘(shell)'은 평온했던 인류의 평화를 뒤흔든다. 각국 군대가 쉘 주변을 통제하고 '첫 접촉(First Contact)'을 기다리지만 정작 쉘 속 외계인들은 그 어떤 요구사항이나 의사 표명도 하지 않는다.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18시간마다 열리는 비행선 입구뿐이다. 언어학 권위자인 루이스는 외계인들의 의사소통 작업에 차출된다. 비행선 입구로 들어선 루이스는 투명한 유리벽 너머의 그들과 마주한다.
기본적인 단어를 하나하나 유리벽에 그려가는 장면에서 감독은 '언어는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너(외계인)와 나(루이스)는 타자다. 전혀 다른 문화적 환경과 경험을 살아온 두 존재는 당연히 서로 소통될 수 없다. 몸짓이나 표정 같은 비언어적 소통도 완전히 다른 종에 속하는 두 존재 사이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럼에도 두 존재는 단단한 유리벽 너머의 서로에게 가닿고자 한다. 상대방의 기분과 의도, 감정들을 기어이 알고자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언어의 발명이 요청된다. 소통하고자 하는 두 존재는 둘 사이를 가로막는 유리벽에 약속된 기호를 그리기 시작한다. 언어가 어떻게 탄생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영화는 '서로에게 가닿기 위해 발명된 약속이다'라고 답한 것이다.
인류 언어와 달리 시제 구분이 없는 헵타포드(영화속 외계인을 칭함)어를 숙지한 루이스는 미래와 과거를 자유로이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사용자의 사고관이 재편된다'는 영화 속 명제를 따른 결과다.
미래도 마치 과거처럼 '기억'할 수 있게 된 루이스는 함께 통역 작업을 한 동료 이안(제레미 레너 분)이 자신과 사랑에 빠질 것이라는 것, 둘 사이에 낳은 딸이 병으로 단명할 것이고 이안은 자신을 떠난다는 미래까지 알게 된다. 영화 도입부부터 중간중간 삽입된 루이스의 회상씬은 그녀의 과거가 아닌 미래였던 셈이다. 파국으로 끝날 미래를 알게 된 루이스에게는 한 가지 선택만이 남는다. 다른 선택을 할 것인가, 예정된 미래를 다시 한번 선택할 것인가.
'그때 ~~를 했다면'으로 시작하는 숱한 회한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때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그때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지 않았다면, 그때 절망한 아들을 혼내는 대신 꼭 안아줬더라면... 파국을 불러온 그날의 선택을 수없이 상기하며 우리는 그때의 자기 자신을 저주한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쉽게 망각한다. 그건 바로,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는 것, 그리고 '안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자기 실수로 괴로워하는 심리 상담 내담자(피상담자)가 흔히 망각하는 두 가지이기도 하다.
영화 전반부 루이스의 회상은 주로 딸과 남편과 있던 부정적인 일들에 초점이 맞춰진다. 자신과 딸을 버리고 떠난 남편과 격무에 지쳐 어린 딸의 질문에 "네 아빠에게 물어봐"라고 퉁명스레 대꾸하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불치병으로 앙상하게 말라가는 딸까지. 부정적인 기억에만 집착하는 루이스의 모습은 처음 심리 상담에 임한 내담자와 같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녀는 잊고 있던 기억을 복기하기 시작한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온 자신의 모습과 남편의 애정 어린 시선, 어린 딸과 보안관 놀이를 하던 행복한 기억들을 그녀는 기억해낸다. 이윽고 회상을 마친 그녀는 자신에게 처음 사랑을 고백하는 이안에게 '다시 한번' 안긴다. 더 이상 지나간 과거(그녀에겐 미래)를 후회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녀의 표정은, 순조로이 상담이 마무리됐을 때 내담자의 그것과 닮아있다. 영화의 시작에 제시된 '상실'을 그녀는 기꺼이 다시 한번 선택한다.
물론 이 영화에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아직 공격 의지를 보인적 없는 외계인을 무조건 선제공격하려는 나라가 하필 중국이라는 점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삐딱한 시선을 잘 보여준다. 또한 영화 서사가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정적이다 보니 고개를 숙이고 조는 관객들도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컨택트>가 기존 SF 영화의 문법에 반기를 든 참신한 영화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외계 인물=전쟁 씬'이라는 편견에 인문학적 시각으로 맞선 감독의 용기와 재기 발랄함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