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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Jan 23. 2017

응급실, 그 막장에서의 기록. 남궁인- 『만약은 없다』

죽음을 읽는 것에 관하여


 한때 '막장드라마'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개연성에 관계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막장드라마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막장드라마 전문 작가라는 말까지 생겨났고, 작가들은 누구의 대본이 더 황당한지 대결이라도 하듯 매주 더 황당해지는 전개로 안방의 문을 두드렸다. 어떤 배우의 눈에선 초록색 레이저가 나왔고, 또 다른 배우는 연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얼굴에 점을 찍고 나타났다.

사진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본디 막장이란 광산의 가장 안쪽, 갱도의 끝부분을 칭하는 말이다. 비교적 안정된 갱도 중간과 달리 막장은 무너질 가능성이 농후한, 말 그대로 '갈 데까지 간' 곳이다. 늘 사고에 대한 불안에 시달렸던 광부들은 막장 작업을 기피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곤궁했던 그들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거뭇해진 안전모를 고쳐 쓴 광부들은 '오늘도 무사히' 따위의 낙서를 벽에 새기고 막장으로 향했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떠밀려 왔을까라는 절망과, 여기만 벗어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이 교차되는 세상의 끝. 광부들에게 막장은 그런 의미였다.


'나는 멍들고 퉁퉁 부은 왼쪽 사타구니를 지혈시키고, 오른쪽 사타구니에 바늘을 찔러댔다. 심폐소생술 중 정맥관을 확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중략) 결국 오른쪽 사타구니에 두 번째 정맥관이 들어갔고, 의사들의 가운이 흥건히 젖었고, 한 더미의 피가 도착했으며, 환자는 죽었다.'

                                                                                                                          - 남궁인 만약은 없다61p


 현대의 막장은 응급실이구나. 응급의학과 의사 남궁인의 수기를 덮은 순간 내가 한 생각은 그랬다. 자살시도자, 교통사고 피해자, 남편에게 목이 졸려 의식을 잃은 부인... 위태로운 목숨들이 밀려 들어오고 그 뒤를 가족들이 종종걸음으로 뒤쫓는다. 나를, 내 아들을, 내 동생을, 내 아버지를, 내 부인을 살려달라는 저마다의 사연이 새벽 응급실을 채운다. 그러나 사연의 간절함과 죽음은 비례하지 않았다. 

"나는 분명 죽으려 한 적이 있다"

 극심했던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고백하는 것으로 저자는 프롤로그를 시작한다. 구체적인 자해 방법과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들을 나열하는 것이 그가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우울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그에게는 '죽음과 맞서 보겠다'는 열망만이 남는다. 의사 인턴 기간이 끝나고 그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모두가 기피하는 그곳, 응급의학과였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이 타인의 죽음과 맞서게 되는 삶의 아이러니. 1부에서 그는 자신과 마주했던 목숨들과, 그 목숨들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집요하게 기록했다. 구해낸 환자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환자도 있었다. 인간은 왜 고통받고, 또 죽어가는가. 환자를 잃을 때 마다마다 그는 자신에게 자문했을 것이나, 감상에 빠지기엔 그의 손에 매달린 다른 목숨들이 너무 많았다. 환자를 살리는 것만이 최고의 윤리로 통하는 응급실에서 철학적 감상은 사치였다.


 그는 책의 시작에 "극적으로 가공했다"라고 자백하고 있으나, 그가 묘사하는 응급실의 현장은 단순히 '사실적이다'는 느낌을 넘어서는 뭔가가 느껴졌다. 그의 진술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뒤섞였고, 그는 그 모호함을 있는 그대로 실토했다.



  경험보다는 교과서로 세상을 배워가던 시절, '진정한 위로는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볼 때뿐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헛소리가 어딨냐며 펄쩍 뛰었던 게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큰 불행을 겪어내는 사람들이 주는 위안이 없지 않음을 알아버렸다. 내 안에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건 아니라는 확인만으로도 사라지는 사소한 불행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저마다의 비극들을 나열해가는 저자의 정직한 호흡을 따라가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돼'라고 되뇌었다. 이것을 타락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1부가 육박해오는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투쟁의 기록이라면 2'알지 못하는 세계: 삶에 관하여'는 말 그대로 삶의 이야기다. 2부에서 저자는 응급실을 찾아온 웃지 못할 환자들의 이야기 등 생활 속 에피소드를 가벼운 필체로 그려간다. 이를테면 거사(?) 도중 '부러진' 성기 때문에 모텔 가운을 입은 채 응급실로 달려온 커플의 이야기 같은 것들. 저자 나름대로는 1부와 정서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애쓴 듯 보였다. 그러나 각자의 문체에 맞는 글감은 따로 있다고 했던가. 내게 남궁인의 문체는 삶의 시시콜콜함보다는 죽음의 엄정함을 전하는데 더 적합한 도구로 보였다. 2120여 페이지는 사실상 '삶과 죽음'이라는 관용적 수사의 형식을 맞추기 위한 수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는지 불행이 되는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란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나는 간혹, 혹은 때때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봐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진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종 대화를 하다 보면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에 관해선 놀라울 만큼 낙관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병실 침대에 누워 유언을 읊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있는 풍경들.


 물론 인간이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려면 죽음에 대한 불안을 어느 정도 접어둬야 한다. 당장 땅이 꺼져 낙상 사할지도 모른다고 믿는 사람이 집 밖으로 나서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미디어를 통해 매일 접하게 되는 각양각색의 죽음들을 우리는 일정 정도 '남의 일'로 치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일상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망각하는데 골몰한 나머지 '무사한 날들'에 대한 감사함까지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무사한 나날들이 간절한 꿈이고 희망일 수 있다고,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변할 거라고, 남궁인의 막장 수기는 그렇게 암시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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