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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Apr 10. 2017

소설 <종의 기원>: 너 자신을 알라, 너무 늦기 전에


자크 루이 다비드(David, Jacques-Louis),  <소크라테스의 죽음 (The Death of Socrates)> 1787년 유화
"너 자신을 알라"


흉하게 불거져 나온 배와 두꺼비를 닮은 이목구비. 지독히도 추하게 생겼던 한 노인이 고대 아테네 사회에 일으킨 파장은 작지 않았다. 신탁을 받은 뒤 정신이 조금 이상해진 노인은 아폴론 신전의 앞마당에 새겨있던 예의 격언을 사방에 전파하고 다녔다. 얼마 뒤 아테네 법정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노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Sōkratēs)였고, 그가 외치고 다닌 격언은 "너 자신을 알라" (γνῶθι σεαυτόν)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건 소크라테스다"는 신탁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정치인, 시인 등 당시 아테네 사회의 지식인들을 찾아 토론을 벌였다. 일개 시민에 불과한 자신이 별처럼 수많은 지식인들보다 현명 할리 없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무수한 지식인들은 소크라테스와의 설전에서 여지없이 패배했다. 본인의 지식과 인품을 과신했던 지식인들은 자신의 무지함을 자처하는 초로의 노인 앞에서 잇따라 무너져 내렸다. 구름처럼 늘어나는 자신의 명성과 제자들을 보며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다. 좋은 삶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말이다.



 정유정의 전매특허인 강렬한 상황 묘사는 종의 기원에서 정점에 이른 듯 보인다. 정유정은 발화, 전율, 폭발 등의 수사를 통해 소년 사이코패스 '한유진'의 살인 일기를 서술한다. 어머니와 이모, 이름 모를 행인까지. 유진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이 주의 할일 목록처럼 차례대로 삭제된다. 폭주하는 서사를 1인칭으로 정직하게 받아 적었다는 점에서, 정유정은 한유진의 충실한 영매(靈媒)가 되었다.


<종의 기원>은 잔인하다. 두 눈 부릅뜬 시체와 피 웅덩이가 새삼스럽지 않고, 죽이느냐 죽느냐의 긴장감은 당겨진 고무줄처럼 팽팽하다. 핏빛 선글라스를 낀 채 세상을 보는 느낌이랄까. 매일 다니던 퇴근길이 께름직해지고 현관문은 잘 잠겼는지 한번 더 확인하게 만든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의 꿈자리는 꽤나 사나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유정이 기획한 <종의 기원>의 진짜 공포는 줄거리의 잔인성에 있지 않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심정으로 어머니의 눈을 노려봤다. 면도칼을 쥔 손가락은 옴칫옴칫 경축을 일으켰다. 어머니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대고 싶어서. 그렇게 누워있지 말고 한 말씀 하시라 권하고 싶어서. 지금껏 아들의 인생을 쥐고 흔든 끝에 마침내 통째로 삶아드신 기분이 어떠신지 묻고 싶어서

                                                                                                                                          - <종의 기원> 84p


한유진은 악마다.  자기 손으로 살해한 어머니의 시체 앞에서 그는 통째로 삶아진 자신의 삶을 안타까워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어머니 자신이 자초했다는 것이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다. 세상 어떤 어머니의 죄가 아들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면도칼에 목을 베여야 할 만큼 중할까. 헌데 문제는, 이 말 같지도 않은 말이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는 데 있다.


유진의 시점으로 바라본 자신의 인생은 어머니와 이모, ‘두 여자가 깔고 앉은 방석이다. 그에게 수영이 갖는 의미를 잘 아는 이모와 어머니는 걸핏하면 수영을 관두게 하겠다는 말로 유진을 통제해 왔다. 먹기만 하면 무기력감이 몰려오는 정신성 약물과 성적 유지 같은 과제가 주어졌지만 유진은 달게 받았다. 양손을 저어 물살을 가르는 순간만큼 그를 자유롭게 하는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여자는 기어이 유진에게서 수영을 앗아갔고, 그의 매분 매초를 감시하며 그를 사육했다. 몇 분이라도 통금 시간을 어기면 반성의 기미가 보일 때까지 잠을 재우지 않았다. 두 여자가 수십 년간 이 유난을 떨어온 이유는 정신과 의사인 이모가 당시 아이이던 유진을 잠재적 사이코패스로 진단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이모는 무기력을 가져오는 약을 통해 유진을 영원히 수감할 감옥을 꿈꿨다. 그들에게 유진은 가족이 아닌, 언제 살인을 저지를지 모를 용의자였을 뿐이다.

사진 출처 =코리안위클리

어느새 독자는 연쇄 살인마의 자기변호에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죽일만했네”라고 끄덕이게 만드는 것이다. 독자들은 자신과 살인마의 내면 사이의 간극이 생각보다 좁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살인자의 살해 동기에 마음 한편으로나마 공감하는 나는, 훗날 유진과 유사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선택을 할까? 그때도 나는 합리적 이성을 지닌 시민답게 분노를 억누르고 대화로만 상황을 풀어낼 수 있을까? 좀 더 깊고, 떠나지 않는 공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게다가 이번의 공포는 문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 따위로는 벗어날 수 없다. 공포의 대상이 나 자신인 까닭이다.


결국 여야 했다. 객체가 아닌 주체여야 했다.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보여줄 수 있으려면.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가는지 그려 보이려면'                                                                                                                                      - 본문 작가의 말


간혹 체포된 중범죄자의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읽는다. 대부분은 욕설이다. '찢어 죽여야 맞다'부터 '너 같은 놈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까지 다양하다. 무수한 욕설들 중 내 관심을 끄는 건 욕설을 뱉는 사람들이 범죄자와 상정하는 심리적 거리감이다. 사람들은 저따위 쓰레기들과 나는 뿌리부터 다르다는 견고한 믿음을 견지한다. 정유정이 냉소하고 있는 지점은 바로 그곳이다. ‘당신 속은 정말 그렇게 선으로만 가득합니까? ’라는 작가의 질문은 섬뜩하다.


프로이트는 악한 인간과 선한 인간의 차이는 음험한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느냐 그렇지 않느냐 뿐이라고 했다. 이 욕망은 타고난 것이기에 인위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내 안 어딘가에 악이 도사리고 있음을 정확히 '아는 것' 뿐이리라. 아는 자만이 주의할 수 법이니까 말이다.


결국 <종의 기원>은 하룻밤의 악몽이다. 악마가 된 내가 사람들을 살해하는 꿈이다. 칼을 쥐었던 손가락의 감각이 너무 생생해서 소름 돋는, 그럼에도 한편으론 묘한 전율이 감돌아 더욱 섬뜩한 꿈. 길었던 악몽의 끝자락에서 정유정은 독자들에게 경고한다.


너 자신을 알라, 너무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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