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언 Oct 12. 2016

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쉽게 판단하지 않는것

몰랐던걸까, 알고싶지 않았던 걸까

    

 선과 악이 분명한 소설은 지루하다. 지루할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생겨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선인이나 완전한 악인은 없다. 그저 선하게 살려 노력하는 사람과 함부로 악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쩌면 '선'과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구분짓길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 낸 발명품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소설은 흥미롭다. 접대부인 여자친구를 폭행한 손님을 때려 죽이는 남자친구(<비상구>), 바닥까지 절망한 이들의 자살을 돕는 일로 먹고 사는 남자(<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기존 선과 악의 잣대로 쉽사리 판단할 수 없는 미확인의 범주에 속해 있다. 기존 사회의 잣대로는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지점들을 작가는 끈질기게 응시한다.      


'[제이] 나는 히어로 같은 게 되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씨발, 사람이 사람한테 저래서는 안된다는 거야. 내 말이 어려워?'

                                                                                                                    - 『너의 목소리가 들려』, 178P     


 십대 폭주족의 리더 '제이'는 화가 나있다. 자신을 거리로 내 몬 세상을 향해, 손 내밀어도 외면하는 어른들을 향해, 십여년 전 고속버스터미널 화장실에 자신을 '싸지르 듯' 낳은 채 사라진 엄마를 향해 그는 발작과도 같은 분노를 터뜨린다.     

 

 반면 제이의 어릴적 친구 '동규'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다. 비교적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동규는 아버지와 새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집을 뛰쳐 나온다. 그러나 제이와 함께 생활하는 내내 동규는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의문을 놓지 못한다. 어느 한쪽에 완전히 투신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동규의 모습은 , '인간사에 매혹당하는 한편 진절머리를 내는'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와 닮아있다.     


 원조 교제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자 아이들, 그 여자 아이들을 재워주는 댓가로 끼니를 해결하는 남자 아이들... 끼니와 말초적 쾌락만이 윤리가 되는 뒷골목 거리에서 제이는 절박하게 질문한다.


내 고통의 이유는 무엇인가


 늘 그래왔듯 세상과 어른들이 그들에게 보내는 시선은 차갑다. 어느 누구도 '저 아이들은 왜 저렇게 화가 났을까?'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마치 저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구제불능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불쾌한 확신으로 가득차 있다.     


'[제이] 그래, 우리는 열받아서 폭주를 하는거야. 뭐에 대해서? 이 좆같은 세상 전체에 대해서. 폭주의 폭 자가 뭐야? 폭력의 폭 자야. 얌전하면 폭주가 아니라는 거지. 엄청난 소리를 내고, 입간판을 부수고, 교통을 마비시킬 때, 그제야 세상이 우리를 보는거야. 폭주는 우리가 화가 나 있다는 걸 알리는 거야.'

                                                                                                                      - 『너의 목소리가 들려』, 255P     


 나는 환경 결정론자는 아니다. 인간은 주어진 조건과 환경과는 별개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열악하다 못해 처참하기까지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지만, 그 분노와 서러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여럿 알고 있다. 아이들의 사정이야 딱하지만, 그 딱한 사정이 아이들이 저지르는 비행과 범죄의 핑곗거리가 되어주진 않는다. 어쩔 수 없는 것과 핑계는 다르니까.     


 그러나, 정말 그것만으로 괜찮은걸까. 난처한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사회 문제만 일으키는 골칫덩어리들에게, 우린 마음껏 돌을 던져도 괜찮을까.   


'골목은 평화로웠다. 코 앞에서 열네댓살의 어린 여자애들이 돌아가며 몸을 팔아 그 돈으로 살아가고 밤이면 난교가 벌어진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오십대 여자가 곁눈질로 제이를 살피더니 종종걸음치며 집으로 들어갔다. 아니, 어쩌면 다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눈 감고 있는지도.'

                                                                                                                     - 『너의 목소리가 들려』, 155P   


 몰랐던걸까. 알고 싶지 않았던 걸까.

 이른바 '문제아'들을 단순한 문제아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보면 상황이 복잡해 진다. 아이들이 소외될 수 밖에 없었던 구조적, 사회적 원인들을 파고 들어가면 책임은 '사회 구성원 전부'에게로 환원된다. 태어날 때부터 문제아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결국 구구절절한 아이들의 사연을 짐작하면서도 침묵한 모두,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모두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제 소설의 목적은 독자들이 쉽게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쉽게 판단내릴 수 없어야 해요.'

                                                                                                                                                  - 소설가 김영하     

 거리의 청소년들이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이야기를 알게 됐다고 해서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있는 건 냉정히 말해 없다. 광고인 박웅현의 말대로 책 한권, 조언 한마디로 뒤바뀔만큼 우리의 삶은 만만하지 않으니까.  

    

 결국 우리가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쉽게 판단하지 않는 것'이리라. 겉모습이 삐딱하다고 해서, 예의 없고 몰상식하다고 해서 함부로 누군가를 정의 내리지 않을 것. 그 태도만이 세대 간, 계층 간의 의미 있는 대화를 가능케 하는 출구이지 않을까.


<표지사진 출처=조선일보>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않는것들>;난 너를 알고싶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