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언 Feb 12. 2017

영화 <재심>: 진실이라는 착각, 정의라는 오만

진실을 찾고자 하는 진심  


#진실(眞實)

[명사] 1. 거짓이 없는 사실 2. 마음에 거짓이 없이 순수하고 바름

파생어: 진실하다, 진실히

                                                                                                                               <자료제공=국립국어원>


 진실이 쉽게 말해지는 시대다. 분열된 사회의 양극단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진실을 부르짖었다. 진실이라는 결과값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개연성을 벽돌삼아 견고한 성곽을 구축했다. 이쪽의 진실을 숭배하는 이들은 저쪽의 진실이 하나의 수사에 불과하다고 확언했다. 자신과 다른 진실을 말하는 자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분노했다.


 1950,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훗날 자신에게 오스카상을 안겨줄 필생의 역작 <라쇼몽>을 제작했다. 변사체로 발견된 사무라이의 죽음과, 그 죽음을 둘러싼 용의자 세 명의 엇갈린 진술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88분간의 흑백 화면 안에서 두 가지 질문에 천착한다. '진실이란 존재하는가''그 진실을 인간이 알 수 있는가'가 그것이다. CCTV나 녹취 등 객관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과연 진실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진실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그날의 진실을 아는것은 가능한걸까.




영화 <재심> 스틸 이미지

 지난 2000810일 새벽 2시경, 전북 익산시 약촌오거리 버스정류장에서 한 택시 운전자 A씨가 전신 10여곳을 흉기에 찔린채 발견됐다. 그 후 피해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사망했다.


 언론이 전한 '약촌오거리 택시운전사 살인사건'의 사실은 간결했다. 중년의 택시 기사가 택시 안에서 칼에 찔린 채 발견됐다는 것, 피해자 몸에 자상(예리한 물체에 찔린 상처)이 약 10여곳 이라는 것, 피해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사망했다는 것. 참혹한 살해 현장이 말해주는 사실은 거기까지였다.  

영화 <재심> 예고편 캡처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요 용의자를 체포했다고 발표한다. 경찰이 체포한 용의자는 당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현우(강하늘 분)'였다. 당시 15살이었던 현우는 학교를 나와 다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경찰은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을 지나던 현우와 택시 기사간에 시비가 붙었고, 분을 참지 못한 현우가 칼을 꺼내 피해자를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법원은 경찰이 밝힌 현우의 혐의를 인정했고, 15세의 소년에게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영화 <재심>은 여기서 시작한다.

영화 <재심> 스틸 이미지

 만기복역 후 출소해 방황하던 현우 앞에 속물 변호사 '준영(정우 분)'이 나타난다. 끈 떨어진 지방대 출신 변호사 준영은 현우의 살인 사건 재심을 통해 대형 로펌에 진출하고자 한다. "살인범 재심 사건이나 돕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던 준영은 10년전 종결된 살인 사건의 퍼즐을 맞추면서 자신의 가슴속 무언가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형사님, 얘(현우)가 갖고있던 칼하고, 시체에 있는 칼자국 크기하고 안 맞는데... 어쩌죠?"

 경찰에 의해 조작된 증거들, 고문을 통한 자백 강요 의혹, 뿌리깊은 검경 유착까지. 하필 그날 그 시간에 주변을 지나간 죄뿐인 15살 소년을 살인범으로 둔갑시킨 진실 앞에 준영은 망연자실한다. "법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인데!"라며 울부짖는 현우를 보며 준영은 침묵을 지킨다. 한 소년의 인생을 끝장낸 법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그 법을 정의라 믿고 공부해 온 자신의 지난 날이 교차했을 터다. 결국 속물 변호사 준영은 현우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투쟁하기 시작한다.


 영화 초반부, 현우의 왼쪽 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꼭 몸에 그림 그리는 것들이 사고를 쳐요"라며 사건 담당 형사는 혀를 찼다. 택시기사와 시비가 붙고, 툴박스에서 칼을 꺼내 택시 뒷좌석에 올라타고... 형사는 현우 본인도 모르는 그날의 사건 발생 경위를 마치 자기가 본 일인양 읊어 내려간다. 문신한 것은 다 그렇다는 선입견을 토대로 조서를 쓰는 형사의 표정. 함부로 확신해버린 진실은 그렇게, 힘없는 개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출소 후, 문신이 있던 현우의 왼쪽 팔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흉터로 가득하다.


20161117일 열린 재심에서 재판부는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는 자막을 끝으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사진출처=YTN>

 지난 1994, 중국 법원은 20살 청년 니 슈빈에게 총살형을 선고했다. 중국 허베이성 스좌좡에서 한 여인을 강간한 후 살해했다는 게 그의 죄목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결백을 주장했던 니 슈빈은 차후 혐의를 인정했고 사형은 예정대로 집행됐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유족들의 끈질긴 재심 요청이 받아들여져 재심 재판이 열렸다. 중국 최고인민법원은 사건의 진범이 체포된 점, 당시 수사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음이 인정되는 점을 들어 니 슈빈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20여년만에 아들의 누명을 벗겨낸 니 슈빈의 부모는 아들의 묘를 치며 오열했다.


 나는 사형제에 반대한다. 어쨌든 우리는 용서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헐렁한 온정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죽여 마땅한 죄가 자행되고 있음을 나 역시 안다. 내가 우려하는 건 '오심 가능성'이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결국 제 3자는 타인의 진실에 완전히 다가설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누군가를 죽여도 좋을만큼 타인에 대해 확신하는 자들의 광신이 나는 두렵다. 100만명 중에 한 명이라도, '실수로' 사람을 죽일 가능성이 있는 한, 사형제는 멈춰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타인의 진실에 완전히 다가갈 수 없다. 그러나 누명을 벗기기 위한 준영니 슈빈 유가족들의 노력만은 진실이었을거라고, 영화관을 나오며 생각했다. 확신하지 않되, 진실에 닿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이 사회를 좀 더 정의로운 곳으로 만드는 첫 걸음이 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단지 세상의 끝>; 모든 자식된 자의 숙명, 가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