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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Mar 07. 2017

영화 <눈길>: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잊지 않겠습니다


#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입니다.


사진 출처=시언

 오랫동안 위안부를 생각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가 포털 메인에 뜰 때면 애써 무시했다. 모 연예인의 아이들이 붕어빵을 먹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따위가 궁금한 척하며 살아왔다. 그런 나를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군 위안부가 명백한 일제의 범죄행위라는 것에 동의하고, 현 정부의 위안부 합의가 엉터리라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쿨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어쩌면 쓸데없이 공감을 잘하는 내 성격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위안부 문제를 직시하는 순간 미어질 가슴을 나는 두려워 했다.


그래서였을까. 영화 <눈길>의 사전 시사회 초대장을 보고 난 "기어이 왔구나"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법정에 선 모두에게 입증책임이 있듯이, 모든 영화감독에겐 관객들의 영화적 흥미를 북돋아야 한다는 책임이 따른다. 보는 이에게 어떠한 감정적 흔들림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게 확인되는 순간, 영화는 몰락한다. 관객들이 '위안부'라는 중심주제의 줄거리를 꿰뚫고 있는 상황이 감독에겐 부담일 수 밖에 없다. 예측가능한 줄거리를 극복하기 위해 감독은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제시하는 방법을 택한다.


 현실속 '종분(김영옥 분)'은 피붙이 하나없이 삯바느질로 먹고 사는 달동네 노인이다. 넉넉치 않은 살림이었지만 그녀의 남다른 생활력은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정도의 벌이를 가져다 주었다. 생활에 짓눌린 그녀의 잠자리는 혼곤하다. 매일밤 그녀는 TV에 수신되지 못한 채 떠도는 전파처럼 아득한 꿈길속을 헤맨다. 뭔가를 영영 잃어버린 사람처럼.


사진 출처=영화 <눈길> 스틸 이미지


 수십년전 조선, 여인들의 얼굴색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매일같이 밭과 들을 쏘다니며 일해야했던 하층민들의 검붉은 낯색은 몸을 부려 생활하는 이의 숙명이었다. 어머니를 챙기며 간신히 하루를 건사하는 종분의 낯빛 역시 그러하다. 학교 교육은커녕 매일 남동생 도시락을 나르기 바쁜 종분에게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기왓집 딸 '영애(김향기 분)'는 선망의 대상이다. 그때까지 종분은 잘 빠진 와인색 코트를 입은 채 등교하던 영애를 '위안소'에서 만나게 되리라는 걸 알지 못했다. 하긴, 누군들 훗날 강제로 종군 위안부에 끌려가리라고 상상해봤을까.


 위안소의 하루는 뭐랄까, 희극적이다. 서너평 남짓한 독방은 허리춤을 끄르고 고쳐매며 들락거리는 제국군으로 분주하다. 사용했던 콘돔은 직접 빨아 다시 써야했고, 일괄적으로 배분한 피임약을 의무적으로 복용해야 했다. 피임에 실패해 임신하거나 성병에라도 걸리는 날에는 각각 강제 중절 수술이나 총살형을 당해야했다. 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폭력이 두 소녀를 짓눌렀다.

사진 출처 =영화 <눈길> 스틸 이미지

 종분과 영애는 몰래 반입해 온 동화 소공녀를 함께 읽으며 일제의 폭정을 애써 견딘다. 삶의 의미를 전부 박탈당한 그녀들에게 생을 견딘다는 건 그 자체로 저항이었다. 이른바 부대가 '해체'되는 날, 일본군의 총탄을 피해 내달린 두 소녀의 앞에는 새하얀 눈길이 펼쳐져 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과 혹한의 칼바람. '꿈엔들 잊힐리'없는 고향 마을을 향해 소녀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걸어간다. 빼앗긴 들판의 끝에는 고향의 냉이 된장국처럼 향긋한 봄길이 펼쳐리라 굳게 믿으면서.


'존재가 그 지속의 의지를 버렸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시작이다'

                                                                                                  - 이문열, 젊은날의 초상


 이나정 감독의 앵글은 두 소녀가 헤쳐온 과거를 비추는 것에 주력한다. 영화는 위안소에서 두 소녀가 얼마나 절망했는지, 시린 절망속에서도 어떻게 인간성을 간직했는지, 왜 질긴 목숨을 부지했는지에 대해 증언한다. 거기까진 좋았다. 어떤 희망은 충분한 절망 후에야 꽃피는 법이니까. 참혹했을 위안소 생활을 상징적 이미지들로 은유한 것도 편안했다. 그러나 감독은 홀로 살아남은 종분의 또 다른 절망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백발의 노인이 된 종분이 위안부 수요집회 플랜카드 앞에 선 사진 한장만이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메세지를 스쳐가듯 보여줄 뿐이다.


"자기네들끼리 가만히 협의를 하고 할머니들을 속이고 결국은 할머니들을 팔아 먹은거야."

                                                                                                     - 이옥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우리한테도 말 한마디 없이 결국은 (양국) 정부끼리 속닥속닥 해가지고 '우리 정부가 타결했다'. 뭘 가지고 타결이 됐다 하겠습니까?"

                                                                                                     - 김복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01731, 위클리오늘 기사에서 인용


 지난 20151228,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10억엔의 합의금을 전달받는 조건으로 ', 일 위안부 합의'를 체결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 인터뷰에서 "(위안 피해자들에게)사죄 편지를 보내는 것은 털끝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미 합의금이 송금된 이상 사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합의금 10억엔을 송금받은 '화해,치유 재단' 대표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합의금) 받으셔야죠. 억울하지도 않으세요?"라고 설득했다.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죄만을 부르짖어 온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눈길>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영화 <눈길> 스틸 이미지

 김영옥, 김새론, 김향기 세 주연은 위안부라는 거대한 비극을 살아내는 개인들의 절망과 희망을 정직하게 담아냈다. 또한 선정적인 장면을 비유를 통해 최소화하면서도  모자라지 않게 담아냈으니 좀 더 다양한 세대에게 다가가기 용이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의 시선이 현재까지도 재생산되고 있는 위안부의 상처에까지 닿지 못한 점, '종분-영애'와의 연대성을 할머니가 된 종분과 문제아 은수에게까지 무리하게 확대하려는 듯한 연출은 끝내 옥의 티로 남는다.


 그러나 종군 위안부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고, 극장에 상영하고자 하는 이들이 남아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나만해도 <눈길>이 아니었다면 위안부에 대해 이처럼 숙고해보지 않았을터다. 영화 <눈길>의 개봉은 우리가 역사의 비극을 아직 잊지 않았으며, 진실을 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선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은 그거면 족할지도 모르지. 전보다  더 복잡해진 머리를 끄덕거리며 나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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