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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Mar 30. 2017

영화 <미스 슬로운>; 민주주의는 전쟁이다

영화가 된 수사학


산치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10~1511

 최초의 민주주의는 어디서 기원했는가. 고대 그리스, 독재자(참주)를 몰아낸 아테네인들은 도시의 현안을 시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정치 구조를 꿈꿨다. 광장과 회당에 모인 시민들은 중요한 일을 직접 결정하고 집행한다. 결정권자와 수용자가 일치하는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오랜 시간 완벽에 가까운 정치체제로 추앙받았다.


 사법 재판을 포함한 모든 현안이 토론으로 결정되는 정치 체제는 아테네에 수사학(修辭學) 열풍을 몰고왔다. 아테네에서 대중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두려운 게 없다. 밟아본 적도 없는 땅의 소유권을 주장할수도 , 수년분의 수강료를 합법적으로 면제받을 수도 있다. 문제는 오직 '어떻게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느냐' 뿐이다. 철학자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수사의 고발에 의해 사형당한 후 평생동안 수사학을 증오했다. 그러나 수사학의 명맥은 민주주의의 역사와 함께 쭉 이어졌다.


 수사학에서는 설득을 크게 세 가지 요소로 나눈다.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가 그것이다. 로고스는 주장의 '합리성'을 뜻하고 파토스는 청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감성'을 칭한다. 마지막으로 '인격'을 뜻하는 에토스는 발언자의 경험이나 경력 등 주장 외적인 것들을 말한다. 좋은 설득은 이 세가지 요소가 적절히 배합될 때 가능하다. 논리가 빠진 감성팔이는 공허하고 감정이 메마른 논리는 퍽퍽하다. 본인의 살아온 이력과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설득력을 갖는 것 역시 요원하긴 마찬가지다.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 미국 수정 헌법 제 2(Second amendment)


 성사율 100%를 자랑하는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총기 규제안 찬성 여론을 잠재워달라"는 보수파의 요청을 받는다. 이길 수 있는 사건만을 수임하는 슬로운에겐 희소식으로 보인다. 미국 시민의 총기 소지권은 헌법에 명시된 권리이고, 군수산업체들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반대파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숱한 총기 난사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총기 규제가 불가한 이유다. 그러나 슬로운은 국내 최고 로비 회사를 떠나 총기 규제에 찬성하는 비영리 단체로 적을 옮긴다. 명백히 유리한 고지를 그녀는 어째서 자기 발로 내려온걸까.


1. 로고스 (logos)

 찬성측의 주된 근거는 '헌법(constitution)'이다. 모든 법률의 상위에 군림하는 헌법의 권위는 막강하다. 모든 법률은 헌법의 정신에 어긋날 수 없으며, 헌법의 정신을 위배한 법률은 판결을 통해 폐기된다. 최초의 성문 헌법에 대한 미국인들의 유별난 자부심은 헌법의 권위를 손댈 수 없는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헌법의 권위를 부정할 수는 없으며, 그 헌법에 무기 소장 권한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찬성측의 표정은 자신만만하다.


"현시대와 어긋난다면, 헌법이라도 비판하고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말하는 법의 이름도 '수정'헌법 아닙니까?"


 슬로운의 반론은 헌법의 권위로 인해 흐려진 사건의 본질을 수면위로 부상시킨다. 시대는 빠르게 변한다.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은 법을 포함한 모든 가치들을 낡은 것으로 퇴색시킨다. 따라서 모름지기 입법자라면 시대착오적인 법안들에 부지런히 메스를 대야한다. 설령 그것이 헌법이라고 해도 말이드. 슬로운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빈틈없는 그녀는 논리에 상대는 아연실색한다.


2. 파토스 (pathos)

 사람들에게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특성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이성(reason)'이라고 답한다. 감정이 아닌 합리성에 근거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본질이라고 사람들은 확신한다. 감정에 근거해 이루어진 선택은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슬로운은 전과자나 정신질환자에 의해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의 상황을 집요하게 언급한다. 이 위험한 무기가 어째서 분별력 없는 사람의 손으로 들어갈수 있었는지, 그들의 총에 희생된 아이들이 얼마나 무고한지를 설명하는 것에 그녀는 집중한다. 반면 무분별한 총기 유통이 총 몇회의 사고로 이어졌는지에 관한 통계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녀가 통계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딱 하나, 딱딱한 숫자보단 극적인 한장의 이미지가 청중의 감정을 고조시키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이미지로 생각한다. 해에 전체 학생의 몇 퍼센트가 학교폭력을 경험하는지에 대한 통계만으로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히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보단, 동급생의 주먹질 시늉에 기겁하며 움츠러드는 왕따 학생의 사진 한 장이 파급력이 훨씬 크다. 대중을 감정적으로 호도하는 게 옳은지 그른지,  실제로 대중이 사진 한장에 좌지우지될만큼 멍청한지 아닌지는 알 바 아니다. 어차피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의결 요건은 다수결이다. 대중만 설득하면 소크라테스도 사형시킬 수 있는 게 민주주의 사회의 장점이자 최대 맹점임을 슬로운은 잘 알고 있다.


3. 에토스 (ethos)

출처= 영화 <미스 슬로운> 포로모션 사진

 논리와 감정을 적절히 배합한 설득을 이어온 결과, 슬로운은 콜드 게임에 가까웠던 표결 수를 따라잡는다. 그녀의 의뢰인마저도 '이정도면 충분히 잘한거다'고 되려 그녀를 위로한다. 그러나 군수회사의 자금 로비와 찬성 측의 정치계 인맥으로 인해 반대측의 패배는 기정사실화 되어간다. 슬로운은 승리를 위한 종지부를 준비한다.


"(총기 규제안 반대가) 그토록 당당하시다면 저 사람에게 먼저 사과하시죠! 총기 난사 사건 때 학교 사물함에 숨어 덜덜 떨며 살육이 끝나기만을 기도했던 저 소녀에게요!"

 슬로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토론장 내 모든 카메라가 그녀의 손끝을 비춘다. 슬로운이 가리킨 곳에는 자신의 부하직원이자 동료 에스미(구구 바샤-로 분)가 서있다. 에스미의 당혹스러운 표정은 그녀가 자신의 아픈 이력을 공개할 생각이 없었음을 암시한다. 에스미가 자신의 비밀을 슬로운에게 털어놓은 그 순간부터 슬로운은 오늘을 예비한 것이다. 에스미의 표정은 점차 일그러지지만, 청들에게 이미 그녀 총기난사 사건의 슬픔과 비통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산증인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설득의 마지막 요소, 에토스의 힘이다.





"사람들이 왜 진보주의자를 싫어하는지 알아요? 그들은 매번 지니까요. 진보가 정말 x나 똑똑하다면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매번 질 수 있겠어요?"

                                                                                                - 미국 드라마 <뉴스룸 시즌1>


 하루는 의사당에서 격론을 이어가는 여, 야당 의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의장을 향해 서류 뭉치를 던지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하며, 마이크를 잡고 마지막 설득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 순간, 엉뚱한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정치가 작동하는 과정은 '토의'일까 '토론'일까?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토의는 '어떤 문제에 대해 검토하고 협의하는 것'이고 토론은 '여러 사람이 각각의 의견을 말하여 논의함'을 뜻한다. 즉 토의가 문제 해결을 위한 상호간의 협의라면 토론은 나의 주장을 관철하고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논쟁에 가깝다. 전자가 '합의'라면 후자는 '언쟁'인 것이다.  언어를 총알삼아 치르는 총성없는 전쟁. 그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민주정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정치가 정의나 진리, 민심 등을 구현하는 과정이라면, 정치는 토의가 맞다. 구현해야 할 진리가 따로 존재하는 이상 크게 다툴 이유가 없다. 서로 기분 상하지 않는 선에서 젠틀하고 교양 넘치는 협의만 거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정치는 그런 식으로 생겨먹지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현대 정치는 각자가 속한 진영의 진리와 정의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임을 나는 양극으로 분열된 광화문 거리에서 배웠다. 설득력 있는 주장과 그렇지 않은 주장만이 있을 뿐, 추구해야 마땅한 절대적 진리 따윈 정치에 존재하지 않는다.


 슬로운에게 부결된 정의는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이루고 싶은 이상이 있다면, 뜯어고치고 싶은 불의가 있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적절 감정을 동원 설득해내야만 한다. 자신이 믿는 정의를 관철하지 못한 채 '진심은 통한다'며 자위하는 정치인의 술회는 공허하다. <미스 슬로운>'정치는 논쟁(debate)의 연속'이라는 또 하나의 설득을 시작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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