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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May 03. 2017

영화 <사울의 아들>: 고통은 어떻게 의미가 되는가

신이 있다면 들으소서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랍비?! 랍비??"

 *랍비 : 유대교의 율법교사. 유대교의 종교의식과 각종 행사를 주관한다.


총성과 함께 한 사람이 구덩이안으로 고꾸라진다. 산처럼 쌓인 시체들을 태우는 불길은 맹렬하다. 한쪽에선 죽은 자들의 소지품들이 수거되어 창고에 적재되는 중이다. 또 한번의 총성과 함께 들끓는 절규와 울음. 죽음을 향해 길게 늘어선 유대인들의 행렬 사이를 한 남자가 헤짚고 있다. 랍비를 찾는 남자의 이름은 사울. 방금 하나뿐인 아들의 사체를 소각하란 명령을 받은 남자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 철학자 아도르노


1940년 봄, 나치 친위대 장관 하인리히 힘러는 폴란드 오슈비엥침에 강제 수용소를 건설한다. 오슈비엥침의 독일어 명칭은 아우슈비츠. 훗날 홀로코스트의 대명사로 기억될 건물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만 약 400만명이 총살, 가스, 인체실험 등으로 희생당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은 유대인이었다.


'선은 악을 모르지만 악은 선을 안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다. 거대악의 이면에는 언제나 체계적인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우슈비츠만큼 잘 증명하는 사례는 없었다. 자그마치 400만명이다. 대학살이 시작된 1942년부터 1945년 폐쇄되기까지 3년동안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400만 구의 사체 영화속 표현으로는 '토막'- 를 효과적으로 '처리'했다. <사울의 아들>은 그 '토막'들을 가스실로 안내하고 소각 후 뒤처리를 담당했던 특수 수용자 집단, '존더코만도'의 이야기다.




존더코만도의 일상은 단순하고 건조하다. 새로운 수용자들이 열차에서 내리면 사람들을 공동샤워실로 안내한다. 나치 병사들이 "샤워 후에는 차(tea)를 주겠다"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사이 존더코만도는 겁에 질린 이들의 탈의를 돕는다.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 그들은 '토막'들의 옷정리를 시작한다. 옷가지들을 수레에 쓸어담는 동안 샤워중인 토막들의 절규와 비명은 그들의 노동요가 된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존더코만도 대원들은 평균 4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처형당했다.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탁월함은 피로 얼룩진 샤워장의 사체들을 아웃포커싱으로 흐리게 처리하는 기법에서 드러난다. 기존의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인종말살의 잔혹성을 폭로하는데 포커스를 맞춰왔다면, <사울의 아들>'일상화된 비극'에 집중한다. 도축이 일과가 된 곳에서 존더코만도 대원들은 무미건조한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취한다. "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같은 말을 통해야만 그들은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 영화의 흐린 초점은 눈앞에 불거진 참상을 애써 무디게 바라보려는 그들의 시선을 대변한다.


무미건조함을 가장하는 존더코만도 대원, 사울의 일상은 한 소년의 시신을 마주하면서부터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그 아이는 사울의 친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영화의 문법대로라면 "내 아들아!" 혹은 "이럴순 없어!"라는 절규와 함께 주인공의 감정선이 폭발할 타이밍이다. 그러나 담담히 아들의 사체를 숨긴 후 사울은 '랍비'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죽음이 일상이 된 곳에서 아들의 장례를 주관할 랍비들을 찾아 헤매는 사울의 행동은 불가해하다. 다른 작업장에 잠입하고, 처형 예정이던 랍비에게 자신의 유니폼을 건네주고 대신 처형대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랍비들은 절박하게 손을 뻗는 사울의 손을 자꾸만 내친다.


예부터 랍비를 위시한 모든 사제들의 권한은 '신과의 소통'을 그 근거로 해왔다. 이들은 신의 지상 대리자를 자처하며 신과의 소통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권한을 확대해 왔다. 신이 필요한 자라면 누구든 사제 앞에 엎디어 자비를 구해야 했다. 종교가 존재해 온만큼의 시간동안, 고통받는 자들에게 사제를 찾는 행위는 신을 찾는 행위와 동일시 되어왔다.


"랍비?! 랍비?"

이런 맥락에서 사울이 랍비들에게 장례절차를 거절당하는 장면들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치받치는 슬픔을 억누르며 신을 찾아 헤매지만 신의 대리자들은 끝내 사울을 외면한다. 그를 외면한 건 사제인가, 신인가. 지고하신 신의 섭리를 알리 없는 사울로선 그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거라고, 사울은 되뇌었했을 게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이 '신께서 보고계신다'는 마지막 희망까지 박탈당했음이 드러나는 순간, 아우슈비츠의 비극성은 극에 달한다. 신조차 외면한 개죽음의 공간에서 신을 찾는 사울의 뒷모습을 영화는 오랫동안 응시한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은 "사람을 죽이는 건 무의미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인간이 죽음보다 못 견뎌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면 그건 바로 '무의미한 죽음'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신도 좋고, 가족도 좋고, 개인의 쾌락도 좋다. 제 나름의 의미를 찾고자하는 마지막 발버둥을 포기할 때, 자신의 발버둥을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때, 인간은 철저한 고독과 패배감 속에서 홀로 죽는다.


사울의 삶은 끝내 의미에 닿았는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탈출한 사울과 동료들이 동네 아이 한명과 마주치는 장면으로 감독은 답변을 대신한다. 사방을 향해 번뜩이는 눈과 너덜너덜한 옷차림의 탈옥수들 앞에서 아이는 얼어붙는다. 자신을 죽여 입을 막는 편이 그들에게 이득라는 걸 아이는 예감한 듯 보인다. 창백한 안색의 아이를 향해 사울은 안심하고 도망치라는 듯 조용히 미소짓는다. 아이는 도망치고, 아이의 옆으로는 나치의 추격병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윽고 아득히 들려오는 총소리를 뒤로한채, 소년은 숲속으로 사라진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숲속으로 사라진 아이는 기억해 낼 것이다. 사냥개를 대동한 나치 병사들의 살의와 이윽고 들려온 총소리를, 그들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사울이 내보인 찰나의 인간성을 아이는 떠올리리라. 마지막 순간, 사울은 그것을 알았다. 그렇게 고통받은 한 인간의 삶은 이야기가 되어 깊은 숲속 어딘가로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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