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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May 23. 2017

영화 <불한당> : 믿음이라는 게임

매와 비둘기의 이야기


     

출처=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스틸 이미지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흥미로운 가상게임을 제안한다먼저 하나의 무리를 설정한다이때 무리의 모든 개체들은 매파’ 혹은 비둘기파’ 중 하나에 속한다매파는 타고난 싸움꾼들이다이들은 싸움이 시작되면 한쪽이 죽거나 전투불능 상태가 될 때까지 물러설 줄 모르는 족속이다반대로 비둘기파는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도망치는 평화주의자들이다매파와 비둘기파 중 어떤 개체가 더 많이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지 가늠해 보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었다.


 게임의 여러 결과 중 주목할만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개체군 전부가 매파인 경우와매파들로만 이루어진 개체군에 비둘기 성향의 개체가 나타나는 경우가 그것이다먼저 모든 개체가 매파일 경우 각 개체의 생존률은 극단적으로 달라진다매파끼리 경쟁할 경우 한쪽은 승자는 자원을 독식하다시피 하는 반면 패자는 죽거나 그에 가까운 부상을 입기 때문이다


 반면 매파 개체군 내에 나타는 비둘기파 역시 경쟁에서 이득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서로 죽고 죽이기 바쁜 집단에서는 자연히 오래 살아남는 개체의 번식 가능성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위와 동일한 형태로 믿음에 대한 실험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이번 실험에서 매파는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자들이고비둘기파는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자들이다한 개체가 매파들의 사회 안으로 내던져졌을 때이 개체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믿을 것인가믿지 않을 것인가.


출처=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스틸 이미지
“사람을 믿지 마. 상황을 믿어야지”

 마약조직의 행동대장인 한재호(설경구 분)는 늘 웃는다상대를 작업할” 기회만 엿보는 밤의 세계에서 그가 늘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그가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이다애당초 누구도 믿지 않았으므로 배신 앞에서 좌절하거나 분노해야 할 이유도 없다조용히 상대의 뒤통수를 겨냥한 채 방아쇠를 당기면 그만이다십대 약쟁이에 불과했던 재호를 밤거리를 주름잡는 거물로 만든 힘의 이름은 불신이었다.


출처=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스틸 이미지
“형 아직도 나 의심해요? 그래도 난 형 믿어요”

 반면 경찰 신분으로 조직에 위장전입한 조현수(임시완 분)는 비둘기파다태연하게 상대파 우두머리의 손등에 송곳을 꽂는 현수의 눈빛은 섬뜩하다그러나 쉽게 믿고쉽게 배신당하기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비둘기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고사로 무너지는 현수의 곁을 지키는 건 그의 경찰 동료들이 아닌 재호다경찰에게 현수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회색분자일 뿐이다배신감에 이를 갈던 현수는 자기 밑에서 일해보자는 재호에게 자신이 경찰임을 밝힌다현수의 고백을 들은 재호는 말없이 소주잔을 채워 건넨다.


 타인을 믿지 못하는 매와 그런 매를 믿고 따르는 비둘기남에게는 잔인하고 서로에겐 애틋한 두 남자는 사시미칼과 권총이 도사리는 밤의 거리를 접수해 간다마침내 자신들의 보스(이경영 분)까지 제거한 두 사람 앞에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된다현수의 어머니를 차로 받아 숨지게 한 게 실은 재호였다는 것이다재호에게 현수 어머니의 죽음은 현수를 조직으로 끌어들이는데 필요했던 기회에 불과했다


 영화의 마지막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재호의 눈빛은 복잡하다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잔인무도한 매는 어째서 현수에게만은 모질지 못했던가조건없이 자신을 믿는다던 현수의 눈빛과 결국 현수에 의해 죽음을 맞는 자신의 신세가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것이다현수가 재호의 숨통을 끊기 직전재호는 아마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믿었던 동생에게 외마디 유언을 남긴다


출처=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스틸 이미지
“넌 나 같은 실수하지 마라”


 재호의 실수는 무엇이었을까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수를 믿어버린 자신의 선택이었을까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20년을 함께한 상관마저 죽여 없애온 과거였을까재호의 시신 옆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는 현수의 눈에서 우리는 그가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였음을 알 수 있다매가 될 것인가 비둘기가 될 것인가앞으로 현수가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가능할까. 어쩌면 선택에 기로에 놓인 건 영화가 끝난 뒤매들이 우글거리는 사회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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