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와 비둘기의 이야기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흥미로운 가상게임을 제안한다. 먼저 하나의 무리를 설정한다. 이때 무리의 모든 개체들은 ‘매파’ 혹은 ‘비둘기파’ 중 하나에 속한다. 매파는 타고난 싸움꾼들이다. 이들은 싸움이 시작되면 한쪽이 죽거나 전투불능 상태가 될 때까지 물러설 줄 모르는 족속이다. 반대로 비둘기파는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도망치는 평화주의자들이다. 매파와 비둘기파 중 어떤 개체가 더 많이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지 가늠해 보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었다.
게임의 여러 결과 중 주목할만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개체군 전부가 매파인 경우와, 매파들로만 이루어진 개체군에 비둘기 성향의 개체가 나타나는 경우가 그것이다. 먼저 모든 개체가 매파일 경우 각 개체의 생존률은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매파끼리 경쟁할 경우 한쪽은 승자는 자원을 독식하다시피 하는 반면 패자는 죽거나 그에 가까운 부상을 입기 때문이다.
반면 매파 개체군 내에 나타는 비둘기파 역시 경쟁에서 이득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서로 죽고 죽이기 바쁜 집단에서는 자연히 오래 살아남는 개체의 번식 가능성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위와 동일한 형태로 ‘믿음’에 대한 실험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번 실험에서 매파는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자들이고, 비둘기파는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자들이다. 한 개체가 매파들의 사회 안으로 내던져졌을 때, 이 개체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사람을 믿지 마. 상황을 믿어야지”
마약조직의 행동대장인 한재호(설경구 분)는 늘 웃는다. 상대를 “작업할” 기회만 엿보는 밤의 세계에서 그가 늘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누구도 믿지 않았으므로 배신 앞에서 좌절하거나 분노해야 할 이유도 없다. 조용히 상대의 뒤통수를 겨냥한 채 방아쇠를 당기면 그만이다. 십대 약쟁이에 불과했던 재호를 밤거리를 주름잡는 거물로 만든 힘의 이름은 불신이었다.
“형 아직도 나 의심해요? 그래도 난 형 믿어요”
반면 경찰 신분으로 조직에 위장전입한 조현수(임시완 분)는 비둘기파다. 태연하게 상대파 우두머리의 손등에 송곳을 꽂는 현수의 눈빛은 섬뜩하다. 그러나 쉽게 믿고, 쉽게 배신당하기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비둘기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고사로 무너지는 현수의 곁을 지키는 건 그의 경찰 동료들이 아닌 재호다. 경찰에게 현수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회색분자일 뿐이다. 배신감에 이를 갈던 현수는 자기 밑에서 일해보자는 재호에게 자신이 경찰임을 밝힌다. 현수의 고백을 들은 재호는 말없이 소주잔을 채워 건넨다.
타인을 믿지 못하는 매와 그런 매를 믿고 따르는 비둘기. 남에게는 잔인하고 서로에겐 애틋한 두 남자는 사시미칼과 권총이 도사리는 밤의 거리를 접수해 간다. 마침내 자신들의 보스(이경영 분)까지 제거한 두 사람 앞에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된다. 현수의 어머니를 차로 받아 숨지게 한 게 실은 재호였다는 것이다. 재호에게 현수 어머니의 죽음은 현수를 조직으로 끌어들이는데 필요했던 기회에 불과했다.
영화의 마지막,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재호의 눈빛은 복잡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잔인무도한 매는 어째서 현수에게만은 모질지 못했던가. 조건없이 자신을 믿는다던 현수의 눈빛과 결국 현수에 의해 죽음을 맞는 자신의 신세가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것이다. 현수가 재호의 숨통을 끊기 직전, 재호는 아마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믿었던 동생에게 외마디 유언을 남긴다.
“넌 나 같은 실수하지 마라”
재호의 ‘실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수를 믿어버린 자신의 선택이었을까.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20년을 함께한 상관마저 죽여 없애온 과거였을까. 재호의 시신 옆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는 현수의 눈에서 우리는 그가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였음을 알 수 있다. 매가 될 것인가 비둘기가 될 것인가. 앞으로 현수가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가능할까. 어쩌면 선택에 기로에 놓인 건 영화가 끝난 뒤, 매들이 우글거리는 사회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