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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Jun 17. 2017

영화 <데몰리션>: 괜찮아, 울지 않아도 돼

마음 가는대로 해



“이모부 돌아가셨다”


수화기 너머 사촌형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마침 어머니는 손님을 배웅나가신 참이었고, 집안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자기 아버지를 유난히 따랐던 사촌동생 앞에서 형은 한동안 미적거렸다. 얼마간의 침묵이 지난 후, 모래사막처럼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형은 아버지의 죽음을 털어놓았다. 간신히 휴가명령이 떨어져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고 형은 짧게 덧붙였다. 사인은 암이었다.    


나에 대한 이모부의 애정은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검은 피부와 골짜기처럼 깊게 패인 주름을 가진 분이셨다. 맞벌이를 했던 부모님 대신 이모부는 걸음마를 시작한 조카의 기저귀를 갈았다. 중학교 입학시험 때문에 올라온 나의 운전기사 노릇을 자청하셨고, 서울 애들 틈새에 놓일 조카가 눈에 밟혀 하루 종일 동대문 옷가게를 도셨다. 키운 정의 한없음을 알게 해준 이모부를 나는 고작 중학생 때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모부가 암투병을 시작하신 후 이모는 내게 “이모부 위해 기도 좀 해줘”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암의 공포를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귀농한 우리 시골집과 이모부의 병원은 멀었고, 그 사이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반 전체가 유치원 동창인 읍내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나는 너무 쉽게 이모부를 잊어버렸다. 내가 이모부의 장례식장에서 오열한 건 그 때문이었다. 슬픔과 그리움이 있어야 할 자리는 죄책감으로 메워졌다. 그토록 나를 사랑한 사람이 죽었는데 왜 슬프지 않을까. 나 자신이 한동안 역겹게도 느껴졌으나 기어이 그리움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출처 = 영화 <데몰리션> 캡처

데이비드(제이크 질렌할 분)는 거울 앞에 섰다. 슬픔도, 분노도 없이 차분한 기색이다. 밖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중이다.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우는 시늉을 한다. 억지로라도 슬퍼지려 해 보지만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와 격려가 부담스럽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 무덤덤한 자신을 힐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문득,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긴 한 걸까 의심하기 시작한다.     


“뭔가를 고치고 싶으면 전부 다 뜯어봐야 돼. 그리고 뭐가 중요한 건지 알아내”


첫 해체는 그의 집 냉장고였다. 사고 직전, 아내는 물이 새는 냉장고를 며칠째 방치한 그에게 서운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박살 내다시피 냉장고를 박살 낸 그는 이제 눈에 보이는 모든 걸 해체하기 시작한다. 사무실 컴퓨터, 삐걱거리는 화장실 문, 철거에 들어간 폐가까지. 복잡한 구조를 지닌 것이라면 무엇이든 잡아 뜯고 부순다. 마치 그 안에 미처 보지 못한 중요한 어떤 게 숨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데이비드의 기행이 늘어갈수록 그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간다. 회사 사장은 그에게 정직을 통보하고, 직장동료들은 하나같이 그를 미친놈 취급한다. 아내가 죽은 마당에 눈물 한 방울 없는 그를 사람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아내가 죽었으면 울어야지. 힐긋거리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경멸이 녹아있다.

출처 = 영화 <데몰리션> 캡처

아내와 단둘이 살던 신혼집까지 부수고 나서야, 데이비드는 길었던 해체 작업을 멈춘다. 두 사람의 결혼 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사랑? 무관심? 고독? 전부일 수도, 무엇도 아닐 수도 있다. 아내의 무덤을 찾은 그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서 차로 돌아온다. 아내가 아닌 내가 운전을 했더라면 모든 게 달라졌을까. 햇살 따스한 운전석에서, 데이비드는 조용히 울기 시작한다.     



제작자들에게 눈물만큼 효율적인 도구도 없다. 가슴 저릿한 감동도, 이별과 상실의 지리멸렬함도, 주인공의 폭포수 같은 오열 한 번이면 말끔하게 해결된다. 참신한 표현을 위해 고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눈물은 언제나 먹히니까. TV와 영화관에서 쏟아지는 눈물 세례 속에서 우리는 ‘슬프면 울어야 한다’는 요상한 공식에 동의하게 돼 버린 건지도 모른다.


내가 이모부를 위해 운 건 이모부가 떠난 지 2년 후였다. 당시 나는 부모님의 손에 끌려들어온 들어온 성당에서 잠이 덜 깬 눈을 치켜뜨고 제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가대가 노래를 끝내고 신부님은 이 주의 강론을 시작하려던 차였다. 문득, 이모부가 보고 싶었다. 가슴과 목 사이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그 길로 자리를 박차고 나온 나는 성당 뒤꼍, 흰색 담벼락을 붙잡고 눈물을 쏟았다. 한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늘에 계신 이모부가 나를 그리워해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 이모부에 대한 나의 길었던 애도는 끝이 났다.     


우리는 살면서 저마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다. 가족일 수도, 오래 정을 주던 반려동물일 수도, 연인일 수도 있다. 감당하기 힘든 상실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애도를 행한다. 눈물은 가장 흔한 애도일뿐, 모두가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싱크홀처럼 뻥 뚫린 가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누군가는 기르던 머리를 자른다. 또 누군가는 데이비드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부수고 해체한다. 애도가 어떻게, 또 얼마나 진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름의 애도를 시작한 이에게 ‘넌 왜 울지 않니? 슬프지 않아?’라고 묻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제3자가 아무리 슬퍼봐야, 자기만 못한 법이다. 과거의 나와 데이비드, 잃어선 안되었던 것들을 잃어버린 모든 이에게 영화 <데몰리션>은 말한다.   


"괜찮아, 울지 않아도 돼. 마음 가는 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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