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에 담아 보냅니다
나라는 인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174cm의 신장과 보통 정도의 근섬유와 지방'이라고 할 수도, '불안, 끈기, 한 가지 음식에 좀처럼 질리지 않는 성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나로부터 기인한 것도 있고, 낳아주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있습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물리적, 생물적, 정서적 요인들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치가 떨리게 싫다거나 유아기 때부터 내 발목을 잡아온 콤플렉스라는 식의 표현도 공정하지 않은 듯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는 내가 보통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 집의 거실 겸 서재에는 책이 많습니다. 철학, 소설, 진화론, 경영학, 종교학... 어지간한 중소규모 대학 학과수에 필적하는 다양한 분과의 책들이 다소 어지러이 쌓여 있습니다. 일일이 세본적은 없지만 천권은 거뜬히 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모든 책을 오로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사 모았다는 생각을 하면 일말의 경외심까지 듭니다.
남들은 이 풍경을 보고 정신없다, 체계가 없다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의 거실이 퍽 마음에 들었습니다. 뭔가 인간적이랄까요. 세계문학전집이 트로피처럼 책장에 도열해 있는 다른 집의 서재는 깔끔하되 숨이 막힙니다.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 한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을 일렬 번호대로 착착 꽂아두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요. 가능하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일상의 복잡함을 닮은 우리 집 서재의 풍경을 사랑하니까요.
바닥을 굴러다니는 책들 중 한 권을 집어 들어봅니다.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입니다. 우리나라 대표작가가 쓴, 그러나 절판되어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책이니 군대로 치자면 예비역 장성쯤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책들은 모두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라면 냄비의 받침대가 되기도 하고 피로한 머리를 고일 베개가 되기도 합니다. 함부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읽다가 지겨우면 책 더미에 내던져 둡니다. 언젠가 다시 손에 잡히게 되는 날 읽게 될 것임을 알기에 아쉬움은 없습니다.
『바다의 기별』을 내려놓으니 또 다른 책이 눈에 띕니다. 진화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유전자의 번식 본능'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한 책입니다. 다소 난해한 기존의 진화 이론 대신 '유전자의 이기심'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통해 인간에 대한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통찰을 던져줍니다.
이 많은 책들이 어떻게 우리 집 거실까지 오게 되었나를 반추해 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은 경영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IMF 때조차 "유능하다"는 칭찬을 수없이 들어왔던 분들이셨다고 옛 직장 상사분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보고 느낀 부모님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학교를 떠난 지 30년도 넘어가는 두 분이 『이기적 유전자』가 아우르는 학문 분과와 시사점을 일일이 기억하고 계셨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 책이 자식에게 읽혀도 좋을 책인가'는 고민만큼 부모를 괴롭히는 것도 없을 겁니다. 적어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전수하기 위해 고민하는 부모라면 그렇겠죠. 가치관이 여물지 않은 자식에게 이상한 사상을 주입하는 건 아닌가, 수많은 질문들이 눈앞을 가릴 겁니다.
어머니. 당신은 밭에서 돌아와 저녁 설거지를 끝낸 새벽, 침대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을 애써 치켜뜨고 모니터를 노려보았습니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대학 시절 독서 목록과 각 기관별 필독서 리스트를 일일이 검색하며 책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자식이 지식 편식을 하는 것도 곤란하니 문학 외에도 동물행동학, 우주과학, 심리학 등 공부해 본 적도 없는 온갖 분야를 섭렵해야만 했습니다. 2000년 대 초반. 모뎀으로 간신히 연결된 인터넷은 느렸고, 블로그 리뷰가 다양하던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그때 당신의 새벽은 너무나 길었습니다.
갓 귀농한 초보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누구보다 열심히 밭을 일구었습니다. 요령을 알지 못하는 만큼, 남보다 더한 수고를 들여야만 한다고 당신은 믿는 듯 보였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는 게 있으면 시골에서 나고자란 농부들을 찾아다니며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시골 사람들의 정" 같은 미디어의 표현은 헛소리였고, 당신은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적잖은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흘린 땀방울은 종종 당신을 배신했고, 당신은 역병으로 노랗게 타 죽은 고추 모종 옆에 앉아 줄담배를 피웠습니다.
새하얗게 지새운 새벽과 맞바꾼 어머니의 책 구입 목록은 짧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다섯 권, 많으면 십여 권에 달했습니다. 한 푼이 아쉬웠던 그때, 가장에게 "애들 읽힐 책"은 사치였을 수 있었습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가 말한 대로, '(경제적) 안전에의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아실현을 찾는 건 어불성설일 테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단 한 번도 한 달에 십수만 원씩 드는 책값에 대해 불만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달 수입이 얼마든, 이번 달에 살 책이 몇 권이든, 당신은 묵시적 동의로서 어머니의 책 교육을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은 고스란히 당신들의 허리춤을 조였을 겁니다.
긴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와 술상을 마주하고 앉을 수 있게 된 나는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책 사주는 거 힘들지 않았느냐고. 당신은 미적지근하게 식은 막걸리를 내 잔에 채워주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부모가 돼서, 딴 것도 아니고 내 새끼들 책 읽힌다는 걸 어떻게 막겠냐.."
놋그릇 가득 따라주신 막걸리가 유난히 묵직했던 밤이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청년에게 수천억 원의 재산이 불법으로 상속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의 유산은 뭐가 될까, 무심코 되뇌어 보았습니다.
얼마 전 친구의 자취방에서 단둘이 술을 마셨습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공무원 1차 시험을 통과한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군대에서 나의 바로 윗선임이기도 했던 친구는 병사 때부터 늘 제게 "부럽다"라고 했습니다. 동년배인 게 부끄러울 정도로 제가 똑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도 얼큰하게 취한 친구는 부럽다는 말을 반복했고, 저는 늘 그래 왔듯 멋쩍게 웃으며 눙쳤습니다. 친구는 뭘 해서 그렇게 똑똑해질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나도 취했던 걸까요. 입에서 난데없는 말이 튀어나갔습니다.
"유산이야"
교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누군가에 비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교수 앞에서도, 흔히 말하는 일류대학교 출신들 앞에서도 지적으로 위축되거나 겁을 먹은 적은 없습니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은 차고 넘쳤으나, 그 사실이 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나의 지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아는 사람이 되어가면 그뿐이었습니다. 아마 위의 친구가 부러워한 것도 이 지적 자존감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내 안에는 오랫동안 쌓여온 지식의 바벨탑이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죽음의 푸가>로 유명한 시인 파울 첼란은 시를 “유리병 속 편지”라고 정의했습니다. 유리병이 망망대해를 건너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시를 전하듯,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책장에 채워준 책들을 보며 당신의 마음을 전해 받습니다. 시간의 위력 앞에서도 산화되지 않도록 꾹꾹 접어 건넨 당신들의 편지를 읽습니다. 이것 하나만 있으면, 생을 헤쳐 나가는데 모자람이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최소한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두 분은 내게 책에서 답을 구하는 지혜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상속해 주고 있던 셈입니다.
시간의 폭정은 계속됩니다. 내가 혼자 서점에 가 책을 고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치가 완연한 중년이 되었습니다. 풍수지탄(風樹之嘆).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려 해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했던가요. 너무 늦기 전에, 가슴에만 품고 있던 편지 한 통을 조심스레 유리병에 담아 보냅니다. 녹이 슬지 않도록,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Don’t look back in anger. I heard you say.
(뒤돌아보며 화내지 말아요.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으니까요.)
- Oasis, <Don’t look back in an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