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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Jul 15. 2017

영화 <택시 운전사>: 우리가 5.18을 기억하는 법

5.18을 겪지 않은 우리들에게.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중략)...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 5.18 기념재단, ‘기억해야 할 5.18 민주화 운동’


대선 투표 당일 아침, 시골마을 정류장은 정장을 입은 할아버지들과 곱게 머리를 빗은 할머니들로 붐빈다. 투표소가 설치된 면 소재지로 가는 첫차를 기다리는 것이다. 시골마을에선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풍경이다. 투표권으로 상징되는 민주시민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노인들은 기꺼이 호미와 낫을 내려놓았다. 버스에 줄지어 오르는 노인들의 얼굴은 비장하다. 되찾은 권리를 행사하는 의식의 시작이다.


반면 20,30대의 선거일 풍경은 사뭇 다르다. SNS에 투표 인증샷을 올리고, 지인들은 '좋아요'를 누르며 "개념시민이네" 따위의 답글을 남긴다. 그러나 대선 역사상 청년 투표율이 50대 이상 장년층의 투표율을 앞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투표에 임하는 자세 역시 상이하다. 투표권이 없었던 시절을 되새기며 비장하게 투표에 임하는 청년은 찾기 힘들다. 투표권이 없던 시절을 책으로 배웠을 뿐, 몸으로 겪은 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 시민으로 나고 자란 청년층은 장년층처럼 비장할 이유가 없다. 이들에게 선거는 공기처럼 늘 곁에 있던 권리를 재확인하는 행사일 뿐이다. 


위의 사례를 두고 ‘요새 애들은 배가 불렀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최순실 게이트 이후 광화문 촛불광장을 메운 시민 중 적지 않은 수가 20,30대 젊은 층이었다. 청년층이 장년층보다 현실 인식이 뒤떨어진다는 근거는 없다. 이들이 민주주의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말 그대로 ‘차이’일 뿐, ‘틀림’이 아니다.   

  

“니는 시위하려고 대학 갔나”
“대학 가요제 나가려고 대학 갔는디요”


<택시 운전사>는 영리한 영화다. ‘5,18 민주항쟁’을 다루되, ‘민주주의’를 항쟁의 근거로 제시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소비층인 2030대가 “민주주의 쟁취”나 “항거” 같은 거창한 이념에 무덤덤하다는 사실을 감독은 잘 알고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스마트폰을 써온 청소년들이 시티폰 시대의 감성에 무심한 것과 같은 이치다.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을, 겪은 사람처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청년들이 5.18을 기억하게 하려면 거창한 구호와는 다른 무언가가 요구된다.


<택시 운전사> 속 시민들이 계엄군과 맞서는 이유는 명료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래선 안 되기 때문이다. 도시 전체를 적 요새처럼 포위하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폭행하고, 가축처럼 손발을 묶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래선 안 된다는 단순한 암시를 통해 <택시 운전사>는 계층과 연령대를 포괄하는 공감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택시 운전사> 속 등장인물들은 일자무식의 소시민이어야만 했다.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그들이지만 국가가 국민을 억압해선 안 된다는 확신은 그들을 독재에 맞서는 투사로 변모시킨다.  


“대학가요제 나가려고” 대학에 들어온 재식(류준열 분)은 독일인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에게 “세상에 광주의 진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재식이 말하는 진실은 민주주의를 부르짖다 죽어가는 ‘투사’들의 진실이 아니다. 재식의 진실은 국가의 거대한 군홧발 아래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는 ‘소시민’들의 진실이다. 택시기사 만섭(송강호 분)이 죽음을 무릅쓰고 피터와 함께 포위망을 뚫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한테, 이래선 안 되는 거니까.


출처 = 5.18 기념재단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흥미가 있든 없든 제대로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5.18 항쟁의 저항 정신이 그 중 하나다. 5.18을 단순히 독재의 군홧발 아래 신음했던 광주의 비극으로 치환해선 안 된다. 비극의 한가운데서도 민주주의 복권을 위해 투쟁한 이들이 그날 광주에는 있었다. 이 점까지 고려했었더라면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변한다. 시대가 달라졌다면 시대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도 달라지는 것이 순리다. <택시 운전사>는 5.18 항쟁이 이데올로기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던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고 설득한다. <택시 운전사>는 청년들이 5.18을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고민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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