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지금도 흐르고 있잖아요"
<고궁을 나오며>로 유명한 시인 김수영은 이웃집의 피아노 연습에 대해 불평을 한 적이 있다. 시인을 괴롭힌 연주곡은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피아노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멜로디의 그 노래였다. 무시로 이어지는 피아노 소리에 짜증을 내던 김수영은 문득 이 소음의 제목이 <엘리제를 위하여>였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해 낸다. 엘리제를 위하여... 엘리제를 위하여.. 한참을 되뇌던 시인은 "제목이 엘리제를 위하여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평한다.
고승의 선문답처럼 난해한 위의 일화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이것을 '뭔가를 좋아하는 데는 아주 작은 이유로도 족하다'는 뜻으로 독해한다. 엘리제를 위하여. 예술 작품의 이름치곤 평범한 축에 속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 제목 하나 때문에 김수영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피아노 소음을 쭉 견뎌내기로 작정한다. 고작 제목 하나 때문에.
배우자의 불륜과 이혼. 순탄할 거라고 믿었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수십 년간 대신 운전대를 잡아준 남편은 "이제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처음으로 운전교습 운전대 앞에 앉은 웬디(패트리시아 클락슨 분)의 미간은 복잡하게 접혀있다. 어쩌다 내 인생이 여기까지 왔을까. 나름대로 생에 충실했다고 확신했는데.
모든 사람은 닥치는 대로 산다. 삶은 언제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3분 뒤에 음주 운전자의 차가 인도를 덮칠 수도 있고, 자비 출판할 거리조차 안될 정도로 시시한 삶을 평생 동안 살 수도 있다. "내일 죽는다는 생각으로 매일을 살라"는 식자들의 조언이 얼마나 속편한 소리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속불가능한 쾌락만을 추구했다면 전세계 사람들 중 절반은 굶어죽었을 것이고, 나머지는 감옥에 있었을 것이다. 이 불확실성을 해결하고자 인류는 갖은 수고를 다해왔다. 심리학으로 현재 감정 문제의 근본을 밝혀 보려고도 하고, 경제학과 첨단과학을 통해 미래 사회를 비슷하게나마 예측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 답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랑해야 할 때는 사랑하지 못했고, 싸워야 할 때는 싸우지 못했어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은 과거형으로 써야 옳다. 지금이 사랑할 때인지, 싸워야 할 때인지 판별할 수 있는 건 미래의 나에게 맡겨진 권한이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할 때 싸우고 싸워야 할 때 사랑으로 도피한 적, 얼마나 많았나. 그래서 현재의 나는 늘 아둔하다. 핸들에 고개를 박고 낮게 읊조리는 웬디의 대사를 듣는 순간, 나는 후반부에 어떤 내용이 나오든 이 영화를 사랑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되뇌며 피아노 소음에 귀 기울이는 김수영처럼.
'사후평가'가 미래의 나에게 일임된 권한이라면, '운전'은 지금 이 순간 운전석에 앉은 나의 권한이다. 나는 다시 한번 엑셀레이터에 발을 올리고, 양측 사각지대를 살피며 운전을 시작해야 한다. 면허 강사 타르완(벤 킹슬리 분)은 웬디가 새로운 차에 적응할 때까지 함께 주위를 살펴주는 조력자다.
"당신 인생에 일어난 일은 거기 그대로 놔두고 빠져나오도록 해요. 자동차에 올라타 핸들을 잡고 있을 땐 거기에만 집중하면 돼요. 당신 인생은 지금도 흐르고 있잖아요"
인생은 보험 회사가 아니다. 사고 후 과실 계산처럼 딱딱 떨어지지 않는다. 어제 생각하면 상대측 과실이 90%는 되는 것 같다가도 오늘 생각하면 내 과실이 100%인 것처럼 느껴지는 게 인생이다. 실제로 누구의 과실이 얼만큼인지 따지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뿐이다. 절망한 당신 대신 조력자가 대신 브레이크를 잡아주는 교습생 신분도 언젠가는 끝난다. 결국 나는 다시 톨게이트로 진입해야 한다.
중도 제 머리는 못 깎는다고 했다. 인생의 톨게이트 앞에서 떨리기는 타르완 역시 마찬가지다. 늘 터번을 감고 다니는 그는 늘 미국 시민권을 소지해야 한다. 9.11 사태 이후 이민자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남편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굳게 믿는다. 처음 드러 선 도로에서 그는 누구나 그렇듯 길을 잃는다. 타르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최선을 다해 핸들을 돌리는 것뿐이다. 어정쩡하고 덤벙대는 손길로 그는 오늘도 핸들을 잡는다.
그땐 그게 최선인 것 같았어.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지나치게 엄격한 평가서를 든 미래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이기 때문이다. 길은 구불거렸고 노면은 비포장인 채로 울퉁불퉁했다.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해 핸들을 돌렸을 뿐이다. 사고가 난 건 유감이지만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
처음 타르완 없이 운전에 나선 웬디의 눈과 아내에게 손을 내미는 타르완의 등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