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편지)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by 시언

"결과를 보면... 완벽주의 성향이 좀 있으신 것 같아요"


기가 찼어요. 심리 테스트를 신뢰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엉터리일 줄은 몰랐거든요. 머릿속 어휘들 중 '완벽주의'처럼 생소한 것도 드물어요. 나는 이번 달만 해도 중간에 포기한 프로젝트가 네 개는 된다고 반박했어요. 이것저것 일을 벌이는 건 좋아하지만 늘 뒷심이 부족한 편이라고도 덧붙였어요. 생각보다 말투가 완고했던 걸까요. 상담자도 조금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어요. 조금 미안했지만 사실이었으니까요.


"물론 그런 류의 완벽주의도 있죠. 근데 제가 말하는 건 조금 다른 거예요. 뭐랄까... 좀 더 넓은 범위에서의 완벽주의죠."


완벽주의에도 종류와 범주가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어요. 지금껏 '완벽'이라는 단어를 숙고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만큼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믿어왔어요. 상담자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가더군요.


"지나온 인생에 너무 엄격한 것 같다고 결과가 나왔어요. 남들은 어깨 한번 으쓱하고 넘어갈 정도의 실수나 치부에 너무 큰 의미를 두고 계시는 것 같았고요.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잖아요? 완벽에 가까운 잣대를 갖는 것도 일종의 완벽주의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어요."


턱, 말문이 막혔어요. 또 뭐라고 궤변을 할지 보자며 벼르던 마음도 이내 사라지더라고요. 돌이켜보면 내 하루는 늘 벅찼던 것 같아요. 잠자리에 누워 흰 천장을 바라보면 꽉 찬 바둑판 같은 하루가 하나하나 복기됐어요. 이건 적절했고, 이건 좀 별로였고, 이건 보완이 시급하고... 어제보다 나아진 하루는 견딜만 했지만, 그대로이거나 퇴보한 날의 꿈자리는 어찌나 사납던지.. 매일 쪽지 시험을 채점하며 살아가는 기분이었어요.


"'내면아이(Inner child)는 내 마음에 있는 다섯 살 인격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우리 영혼 속 다섯 살 아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른들은 성숙한 인격으로 내면 아이를 감추고 있을 뿐이다"

- 안광복, 『서툰 인생을 위한 철학 수업』 114p


상담사와 헤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공기가 답답했던 기억이 나요. 항상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했고, 그러려면 과거의 실수와 실책을 찾아 고쳐야 했죠. 없으면 이불의 먼지를 털 듯 털어서라도요. 그러므로, 과거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 늘 죄인이었어요. 하루만큼 현명해진 나는, 고작 하루만큼 아둔했을 뿐인 어제의 나에게 모질게 굴었어요. 그땐 왜 그랬어. 왜 그 정도 밖에 못한 거야. 쏟아지는 질책앞에 아이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어요. 나름대로 애써왔는데, 그렇게 하면 행복할 것 같아서 그런건데.. 나는 나의 내면아이에게 모진 부모였던걸까요.


"인간은 노력하는 만큼 방황하는 법이노라"라고 괴테는 말했죠. 괴테는 방황이 노력의 반증이라고 봤어요. 방황해 왔다는 건 뭔가를 위해 애써왔다는 뜻이라고,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라고 괴테는 『파우스트』 속 신의 입을 빌려 말했어요. 평탄한 삶을 살았다는 말이 자랑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죠. 노력하지 않았다면 방황도 없었을 테니까요. 방황이 남긴 교훈을 새기되, 방황 자체에 대해 자책하지 않을 것. 경험을 통해 뭔가 배웠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요.


우리의 방황은 멈추지 않을 거예요. 당신과 나의 노력이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방황의 가짓수도 늘어만 가겠죠. 매일 다른 삶의 문제들과 맞서다보면 벅찬 하루가 간신히 지나갈 겁니다. 내일이 오기 전에, 덤벙거리는 발걸음으로 꾸역꾸역 어제를 건너온 우리 자신에게 격려의 한마디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 표지 사진 출처 = 조선비즈 포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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