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웜 바디스>: 회색빛 커튼을 헤치고 들어온 그대

좀비 영화의 신기원

by 시언


중학생 때 일이다. 새로 부임한 영어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A4 한 장짜리 유인물을 돌렸다. 팝송 'heal the world'의 가사 전문이었다. 영어에 미숙한 우리를 위해 선생님은 가사 한줄마다 한글 해석을 달아 놓으셨다. '세상을 치유하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들자'는 류의 가사였다.

심드렁하게 가사를 읽던 나는 이 노래가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이라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히트곡이라는 건 둘째치고 사랑 얘기가 아닌 가요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아이리버 최신형 MP3로 나름 음악 애호가임을 자처했던 나였지만, 사랑이 주제가 아닌 노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여기선 외롭다고 난리고, 저기선 다시는 사랑 안한다고 극성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결국 사랑이 문제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세상이 온통 잿빛이다. 길거리 행인들의 표정도, 새들의 지저귐도, 작렬하는 햇빛도 회색 커튼이 쳐진것처럼 흐릿하다. 어쩜 일상의 하나하나가 이렇게도 뻔할까. 나 역시 뻔한 이유 – 편의점에 간다든지 – 로 걷고 있으니 불평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다.


몇 시간째 잠잠한 휴대폰을 꺼내보면 오늘 아침에 온 광고 문자가 읽어달라고 농성중이다. 매일같이 보내는 쪽이나 끝까지 안 읽는 쪽이나 참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편의점에 다녀와선 뭘 하려나? 어제처럼 일하고 쉬다가 자겠지. 좀비만 남은 지구의 좀비처럼 나는 터덜터덜 걷는다. 잠시 후 그녀(그)를 보기 전까지는.




출처 = 영화 <웜바디스> 캡처

늘어난 후드티와 헤진 청바지. 미국의 전형적인 청년 백수 차림의 주인공(니콜라스 홀트 분)은 좀비다. 좀비가 된 후 그는 자신의 이름, 나이, 직업, 성격 등 모든 것을 잊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극도의 허기와 단순한 일상에서 오는 권태 정도다. 간혹 인간에게 총을 맞으면 분노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시체가 화를 내봤자 얼마나 낼 수 있을까. 심장이 멈춘 자에겐 총상의 통증조차 사치다.


출처 = 영화 <웜바디스> 캡처
"먹...지 않을게. 지...켜...줄거야(Don't eat. keep you safe)"


예민한 후각을 따라 당도한 건물에는 먹잇감들이 농성중이다. 인간들은 괴성을 지르며 저항하지만 굶주린 좀비떼를 당해내기엔 숫자가 적다. 요란한 식사(?)가 끝나갈 무렵 그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온다. 그녀의 물결치듯 내려온 금발과 반짝이는 두 눈을 본 순간 그의 시선은 슬로우 모션이 걸린 듯 오랫동안 그녀에게 머문다. 철학자 바디우가 말한 "둘의 경험"이 현현하는 순간이다. 생각을 고를새도 없이 그는 그녀와 자신의 아지트로 도망친다.


해치지 않겠다고 몇번씩 말했지만 겁에 질린 그녀는 여전히 공황 상태다. 방금까지 함께 웃던 동료들이 좀비들에게 사냥 당했으니 무리는 아니다. 놀라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의 모든 게 궁금하니까. 끈질긴 노력 끝에 그는 그녀와 가까워지는데 성공한다. 여자(줄리)는 그에게 R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출처 = 영화 <웜바디스> 캡처

영화에서 카메라 구도는 많은 걸 말해준다. 구타당해 쓰러진 인물의 눈높이에 맞춰 올려다본 카메라 구도를 통해 서러움과 절망 등을 담아내는 식이다. 겁에 질린 줄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R은줄리의 옆좌석에 천천히 눕고 그에따라 카메라 앵글도 옆으로 비틀린다. 표면적으로는 R의 시선을 현실감 있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옆으로 비틀린 카메라 구도는 줄리를 만난 R의 세계관이 변화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 했다. 전무(全無)했던 삶에 2가지 의미(R이라는 이름과 줄리)가 생겼으므로 R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R의 심장은 다시 한번 뛰기 시작한다.

출처 = 영화 <웜바디스> 캡처

좀비 남자와 인간 여자의 사랑은 잠잠했던 좀비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다. 굳게 맞잡은 R과 줄리의 손을 보며 좀비들은 잊었던 기억들을 회상한다. 목숨처럼 아끼던 자식과 소풍을 갔던 기억, 부드러웠던 아내의 손바닥의 감촉.. 딱딱하게 굳었던 좀비들의 심장이 하나 둘 뛰기 시작한다. 인간들은 '심장이 뛰지 않음에도 움직이는 시체'를 좀비라고 불렀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좀비가 아니다. 쩍쩍 갈라진 가뭄의 땅에 내릴 구원의 비는 결국 '사랑'일 것이라고 <웜 바디스>는 말한다.


기존 좀비 영화에서의 좀비는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속 나치당원 같은 존재였다. 맘 놓고 찢고 때리고 죽여도 가책이 없는 인류 공공의 적. <웜 바디스> 이전 좀비들은 관객들의 말초적 파괴욕을 해소하기 위해 존재했다. 그러나 조나단 레빈 감독은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좀비적 특성을 사랑을 잃은 현대인으로 은유해냈다. 심장이 뛰지 않는 것이 좀비라면, 매일매일을 거저 얻은 생처럼 무료하게 보내는 나는 무엇인가. 영화가 끝난 후 남는 질문은 서늘한 구석이 있다.




사랑은 '온다'. 얻고자 발악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피하려 애쓴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니다.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던 작가 김훈의 표현이 타당하다면, 사랑은 가을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따스한 사랑 영화 한 편 본다고 일상이 크레파스통처럼 다채로워지는 일은 없다. 영혼 없는 광고 문자들이 휴대폰을 울릴 것이고 누군가는 편의점을 향해 걷겠지. 내일도, 모레도 우리네 일상의 대부분 회색빛일 것이다.


회색빛 일상에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웜 바디스>는 한 편의 동화다. 언젠간 나한테도 사랑이 오겠지. 대책없고 막연한 기대감을 심어주는 예쁜 동화. 그러나 그 막연한 희망이 회색빛 일상을 견디는 힘이 되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웜 바디스>는 충분히 좋은 영화이지 않을까. 동화를 믿는 소년처럼, 회색빛 커튼을 열어젖히고 들어올 누군가를 기다려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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