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처럼 사랑했던 것들이 있었음을
이탈리아 로마의 한 고급 호텔, 유명 영화감독 살바토레(자크 페렝 분)에게 한 통의 부재중 전화가 남겨져 있다. 수신인은 토토. 그의 아명이었다. “알베르토(필립 누우레 분)가 죽었다”는 소식과 장례식 일정을 남겼다고 했다. 괜찮냐는 애인의 물음에 둘러대며 그는 밤새 뒤척인다. 30년 전, 넓은 세상으로 가 돌아오지 말라던 알베르토 아저씨의 음성이 그의 귓가에 맴돈다.
시칠리아 섬 시골마을, 마을에 하나뿐인 극장 ‘Cinema paradiso’안에서는 소박한 시사회(?)가 진행되는 중이다. 관객은 영화관 관장이자 동네 성당 신부 한 사람뿐이다. 흑백 화면 속 인물들이 키스를 할 때마다 신부는 가차 없이 종을 울린다. 마을 유일한 영사기사인 알베르토는 한숨을 쉬며 영사기 필름에 표시한다. 마을 사람들은 오늘 밤에도 키스신을 보지 못할 것이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게다.
요사이 알베르토는 골치가 아프다. 매일 영사실에 찾아오는 토토(살바토레 카시오 분) 때문이다. 6살의 이 맹랑한 꼬맹이는 영사실에 올라와 이것저것 캐묻기 바쁘다. 이건 뭐고 저건 또 뭐고... 질문 세례가 끝나면 아이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내뺀다. 보나마나 아까 검열당해 잘라낸 키스신 필름 조각을 슬쩍했을 것이다. 가연성이 높아 위험하다고 몇 번을 경고해도 들어먹을 생각이 없다. 필름만 보면 눈을 반짝이는 꼬마 토토를 알베르토는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머리 희끗한 중년의 영사기사와 6살의 꼬맹이는 그렇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시네마 천국>은 두 가지 감정선을 축으로 진행된다. ‘사랑’과 ‘상실’이 바로 그것이다. 살바토레의 회상 속 토토는 사랑할 것이 많아 좋았던 소년이었다.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영화와 퉁명스러우면서도 누구보다 자신을 챙기는 알베르토 아저씨, 볼 때마다 아름다운 여자친구 엘레나까지. 아름다운 것은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게 많은 세상은 아름답다고 토토는 믿었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 잃는 것이 더 많아지는 순간이 온다. 화재 사고로 두 눈을 잃은 알베르토 아저씨는 자꾸만 마을을 떠나라 강권하고, 사랑하는 엘레나는 부모의 반대 때문에 자신을 떠났다. 토토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가난이 그의 죄였다. 한동안 수심에 잠겼던 토토는 아저씨의 조언대로 고향 마을을 떠났고, 성공한 영화감독이 되었다.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된 살바토레는 더 이상 영화를 말할 때 웃지 않는다. 직업이 된 취미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살라토레는 호텔을 나와 시칠리아 행 비행기에 올라탄다.
30년만에 살바토레가 고향집의 벨을 눌렀을 때, 그의 어머니는 털실로 뜨개질을 하던 중이었다. 벨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실뭉치를 쥔 채 아들을 맞으러 가고, 카메라 앵글은 자리에 남아 한올씩 다시 풀리는 뜨개질감을 비춘다. 아무것도 직조되지 않았던 가능성의 유년시절로 살바토레가 돌아왔음을 보여주는 은유다. 그러나 다음 씬으로 넘어가기 직전, 풀리던 털실은 일시정지된 것처럼 멈춘다. 어른이 되어버린 살바토레는 다시는 토토가 될 수 없다. 그는 알베르토 아저씨와, 아저씨를 따르던 어린 자신을 애도하기 위해 고향에 잠시 ‘들렀’을 뿐이다. 장례식이 끝나면 그는 로마로 돌아갈 것이고, 뜨개질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30년만의 고향에 그때 그대로인 것은 없다. 어른들은 죽거나 늙어버렸고 매일 밤 온 마을을 울고 웃기던 동네 극장은 오래전 폐관했다. 상실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추억뿐이므로, 추억은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증거가 된다. 오직 끝난 것들만이 추억이 되는 까닭이다. 고작 추억 때문에 살바토레는 다신 돌아오지 말라던 아저씨의 유언을 어긴 셈이다. 그러나 아저씨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를 위한 선물을 남겨 두었다. 어린 날의 토토가 한움큼씩 훔쳐가던 필름 조각을 이어붙인 필름 한 줄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살바토레는 아저씨의 유품을 재생한다. 맥락도 이유도 없이 나열되는 키스신들은 이유 없이 영화가 좋았던 꼬맹이 토토와 닮아 있다. “마지막에 무엇을 하건 그것을 사랑하렴”. 알베르토는 마을을 떠나는 청년 토토에게 당부했었다. 알베르토가 미처 덧붙이지 못한 한 마디는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렴" 이었으리라. 살바토레에게 추억은 상실의 증거가 아닌 선물이다. 목숨처럼 사랑했던 것들이 그때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