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보이는 그저 일부분
산을 좋아하고,
나무를 좋아한다.
자연을 좋아한다는 말을 이렇게 바꿔 말하기도 한다.
산을 좋아하는 것 치고는 산을 잘 다니지 않고,
나무를 좋아하는 것 치고는 송충이 때문에 나무 근처에 잘 가지 않는다.
그저 멀리서 보이는 산의 일부분, 나무의 일부분을 향유하는 자체를 즐긴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다.
모순이 있는 사람을 참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내 삶에도 모순이 많다.
배가 부르다고 하면서도 계속 먹기도 하고,
졸리다고 하면서도 뜬눈으로 밤을 새기도 한다.
전체에서의 일부분.
그 작은 일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할 수 있을까?
모순이라는 테두리에 넣고 나면 비난이 수월해지는데
과연 속단하지 않는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어릴 적 살던 마을은
농촌의 여느 마을처럼 몇 집들이 모여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서로 옆집, 윗집, 아랫집 하며 또래들과는 자연스럽게 동네를 뛰어놀았고
드라마에서처럼 식사시간이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 둘 귀가를 했더랬다.
윗집에는 나와 동갑인 친구가 살았었는데
그 친구는 당시의 내가 느끼기에 악의 없는 새침함을 지니고 있어서 때로는 얄밉기도 했지만,
제일 가깝게 지내고 내 의견을 잘 따라주던 내게는 좋은 친구였다.
윗집친구와 우리 집의 거리는 어린아이의 뜀박질로도 10초면 다 닿을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 친구의 집은 기와로 된 멋진 한옥이었고,
나의 집은 낡고 허름한 슬레이트 집이었다.
그 아이의 집과 우리 집 사이는
동네 아이들이 다니는 아주 좁은 골목길이 있더랬다.
그 골목길엔,
뿌리가 깊게 박혀있는 돌이 있었다.
한 번은 돌 주변을 파내면서 돌의 전체모습을 보고 싶어 했지만,
호기심 많은 어린 시절의 아이들의 관심사는 쉽게 다른 곳으로 향했고
그 돌은 계속 그 자리에 박혀있었다.
워낙 단단하고 강건하게 박혀있어서,
그 골목을 뛸 때면, 그 돌을 도움닫기 하여 좀 더 빠르게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그 골목을 뛰던 내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나는 그 돌부리까지 날아가 턱을 부딪히고 말았다.
살점이 짓이겨지고 피도 많이 났다.
집으로 돌아가니, 지혈제인 흰 가루를 톡톡 뿌려주시고,
빨간약(당시 우리 집의 만병통치약으로 빨간약, 정로환, 호랑이기름이 있었다.)을 발라 주셨다.
통증의 기억보다,
친구들과 놀지 못한 아쉬움보다,
부끄러웠던 기억이 가장 크게 남았다.
어린 마음에 그렇게 크게 다쳤는데도
빨간약 하나 바른 내 모습이 부끄러웠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밝아 보이는 이에게도 고통이 있을 수 있고,
여유로워 보이는 이에게도 조급함이 있을 수 있다.
반대로 어려워 보이는 이에게 행복이 가득할 수도 있다.
세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많은 상황들이
감정을 통해 갈등을 만들고
그 갈등을 해결하고 수용하는 과정들을 통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돌부리는
얼마나 큰 이야기를 묻어두고 있을까?
겨우 보이는 작은 일부분에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오늘 멈춘 시선 : 내게 보이는 그저 일부분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