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떡볶이만 먹고 싶어
떡볶이는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
겨울을 알리는 패딩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날은 따스하다. 바싹 마른나무의 메마름이 왠지 모를 허전함을 가져다주었다. 두꺼운 패딩으로도 감쌀 수 없는 겨울의 허전함은 무엇으로 채울까. 역시. 역시나 떡볶이다.
누군가와의 만남은 언제나 떡볶이로 시작된다.
친구와의 만남의 장소는 떡볶이 집. 정류장에서 만나도 늘 떡볶이 집으로 향한다. 뭐 먹고 싶어 가 아닌, 떡볶이 먹으러 가자 였다. 떡볶이에 열정적인 나에 비해, 덜 열성적인 친구가 의심스러워. 이 맛있는 떡볶이에 감탄을 더하지 않냐고 물으니. 본인 엄마가 떡볶이 장사를 하신단다. 그래서 자신은 지겨운 음식이라고. 20대에 알게 된 그 말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가 3년 넘게 모른 척을 해왔다니. 너네 집에서 먹었다면 더 많이 주셨을 텐데. 아쉽다. 공짜로 먹기도 했을 텐데. 아쉬웠다. 지나가다 친구를 부를 때. 거절할 수 없는 떡볶이를 건네주시면 모른척하고 먹었을 텐데. 아쉽다.
집에 데려다 주기 전 남자 친구와의 마지막 장소는 늘 떡볶이 집이었다. 장사가 끝나기 전에 가야 많이 주신다. 남자 친구가 이쁘장하게 생겼다고 더 주셨다. 나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아줌마는 늘 내 남자 친구가 이쁘다고 했다. 상관없다. 그로 인해 우린, 일 인분의 떡볶이를 이 인분으로 먹었기에. 그런 말은 괜찮다. 아무렴 어떠한가 떡볶이를 더 주시는데. 늘 나는 떡볶이에게 진심이었고. 진심으로 원하는 떡볶이를 남자 친구는 늘 줄을 서서 사주었다. 지금의 남편이 된 남자 친구는 그때 같이 맛집을 찾아다니던 그 진심은 사라진 지 오래다. 가끔 반찬으로 떡볶이를 했다는 이야기에 기겁을 한다.
아이가 태어났다. 미음을 먹고. 굵은 밥알을 삼키고. 김치를 먹을 수 있었을 무렵. 나는 떡볶이를 가르쳤다. 처음 먹은 중독성 강한 그 맛에 이제 막 김치를 먹게 된 아이는 반찬으로 떡볶이를 해줘도 기겁을 하지 않고 행복하게 먹어주는 기특한 어린이로 성장했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를 기다려 버스를 타고 오늘 선택한 떡볶이 맛집으로 향한다. 보통 떡볶이 맛집은 여대 앞이 많으므로. 여대 앞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떡볶이를 먹고 있을 땐, 여대생 누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사장님의 무한 애정도 받으며 아이라고 최대한 덜 맵게 제조한 그 떡볶이를 맛있게 먹는다.
말랑한 떡은 매콤 달달한 소스에 어우러져 나의 모든 시간을 행복으로 덮어준다. 슬프고 가슴 아팠던 기억마저 말랑 매콤 달달의 기억으로 덮인다. 배고파서 먹었던 기억이 아닌, 허전함과 공허함을 채울 매운맛으로. 나와 모든 이들에게 슬픔도, 가슴 쓰린 기억도, 공허함과 허전함과 무기력함 마저도 매운맛에 항복한다. 추억의 맛이라며 먹는 시대는 지났다. 감사하게도 떡볶이에 진심인 분들의 성과로 전보다 더 말랑한 떡에 어떤 조화로 먹어야 맛있을지를 알게 되었다. 이젠 추억의 맛이 아닌 가슴의 무언가를 채울 매운맛으로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