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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k May 30. 2018

모두 다 같을 필요 없다

A&futura SE100

  아스텔앤컨의 신제품이 발표 소식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지난 뮌헨 오디오쇼에서 아스텔앤컨은 프랑스 그래피티 아티스트 또마 뷔에와의 합작 제품을 선보였는데, 개인적으로 이 제품에 관심이 확 쏠리더군요. 사실 이번 SE100의 사용기는 제품의 소리도 소리지만 뒷면에 무슈 샤가 그려진 제품의 디자인에 반해서 제가 먼저 대여를 의뢰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가 대여받은 제품은 일반 버전이었다는 슬픈 소식을.... 뒤로 한 채 오랜만에 내맘대로 작성하는 사용기를 끄적여 봅니다. 아스텔앤컨 SE100입니다.


  AK380 이후 아스텔앤컨은 향후 제품 개발 방향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소비자에게 계속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가격적으로는 이미 정점을 찍은 상태인데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라인업 역시 그리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모습이었지요. 단순하게 성적 순으로 줄을 세우고 체급차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요. 380 이후 출시한 하위 기종들이 기존 라인업 중간에 끼어들게 되면서 특단의 조치 없이는 라인업 정리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스텔앤컨이 변화의 조짐을 보여준 첫 번째 기기는 KANN이었습니다. 기존의 컨셉과 전혀 다른 기기의 등장은 단순히 제품명이나 디자인뿐 아니라 이제까지 유지해오던 사운드 튜닝의 방향마저도 새롭게 재설정되었습니다. 장점만큼 단점도 뚜렷한 기기였지만 제 생각으론 KANN 덕분에 이후 A&ultima SP1000이 지금처럼 높은 완성도로 개발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AK 넘버링을 버리면서 이제야 아스텔앤컨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고 말하면 무리가 있을까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으로 현재 포터블 플레이어의 정점에 위치한 기기는 SP1000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 UI, 음질 등 어느 하나 떨어지는 부분이 없습니다. 딱 한 가지, 포터블이 맞나 싶을 정도의 무거운 무게가 흠이긴 합니다만, 이전처럼 케이스 장난을 생각지 않고 처음부터 SS와 COPPER로 제작한 부분도 우리 아스텔앤컨이 달라졌다고 볼 만합니다. 


  A&ultima 발표 당시에도 추후 별도의 라인업을 구축할 예정이라는 언급이 있었는데요. 당시에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라인업을 구분할지 의문이었습니다. 이전처럼 단순히 성능 차이로 구분할 생각이라면 굳이 이렇게 라인업의 명칭까지 다르게 붙일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내심 라인업에 따라 사운드 튜닝 방향이 달랐으면 했는데, 그 바람이 절반 정도는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A&futura는 향후 A&ultima와 함께 나름의 하이엔드 구성을 갖출 만한 라인업으로, 그리고 A&norma는 기존의 어지럽혀진 보급형 라인업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는 라인업으로 자리를 잡지 않을까 싶습니다.


  SE100 사용기를 작성하면서 보다 정확한 비교를 위해 SP1000과의 비청을 진행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음질을 판단할 때 적용될 수 있는 대부분의 기준에서 SP1000이 SE100보다 낫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SE100은 실패작인가? 앞서 A&futura가 A&ultima와 함께 하이엔드 라인을 담당할 거라는 이야기는 헛소리였냐고 묻는 분이 계신다면 제 대답은 ‘그건 아닙니다’입니다. 



SE100 스펙


  본격적으로 소리에 대해 평하기 전에 예의상 SE100의 눈에 띄는 스펙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가장 먼저 포터블 플레이어로는 최초로  ESS사의 ES9038PRO DAC이 사용되었습니다. AK380 이후 출시된 아스텔앤컨 기기들에는 대체로 AKM사의 DAC이 탑재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변화라 하겠습니다. 최근 출시되는 오디오 기기들은 ESS사와 AKM사의 DAC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할 정도로 현재 두 브랜드가 오디오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만 포터블 플레이어에서만큼은 AKM이 유독 강세를 보이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ES9038PRO의 경우 소비 전력이 크다는 점, 그리고 그에 따라 발열도 만만치 않다는 점 등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거치형 기기들에서만 사용됐었는데 이번 SE100에서 처음으로 해당 DAC을 사용한 것입니다. 



  ES9038PRO나 SP1000의 AK4497EQ나 사실 SNR, THD+N 등 수치로 나타나는 성능적인 면만 봤을 때는 이미 차고 넘치는 성능을 보유한 DAC입니다. SE100은 단일 DAC 구성, SP1000은 듀얼 DAC 구성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소비 전력 및 발열 문제에 따른 한계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덧붙여서 ES9038PRO는 8채널 구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단일 DAC이라고 하더라도 성능적인 면에서는 전혀 뒤떨어짐이 없습니다. 오히려 걱정이 되는 것은 배터리 구동 시간과 발열 부분인데, 스펙 상 SE100의 배터리 타임은 11시간으로 SP1000의 12시간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발열은 심한 편에 속하는데 SE100을 주머니에 넣고 장시간 청음했을 때 주머니가 따끈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가뜩이나 슬슬 날씨가 더워지는데.. 별도의 케이스에 넣고 다니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밖의 부분은 SP1000과 대동소이하거나 SE100이 조금 모자란 수준입니다. SE100의 내장 메모리가 128GB로 SP1000의 절반 수준이라는 점, 그리고 케이스 소재로 알루미늄을 사용했다는 점은 SE100의 위치가 SP1000보다 한 단계 아랫급이라는 것을 체감케 하는 부분들입니다. 하지만 꼭 알루미늄 케이스가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 덕분에 무게가 상대적으로 가벼워졌습니다. 거의 400g에 육박하는 SP1000과 비교하면 250g에 조금 못 미치는 SE100은 들고 다니는 데 부담이 훨씬 줄었습니다. 고작(?) 150g 가량의 차이지만 실제로는 들고 다닐 수 있음과 없음 정도의 차이로 느껴지는 수준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이후에 SE100도 SS 혹은 COPPER로? 하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렇다면 가격 역시 SP1000 수준에 가깝게 오르겠지만요.




SE100 vs SP1000

  이제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 두고 SE100의 소리에 대한 감상으로 넘어갑시다. 제가 SE100을 청음하기 전 기대했던 것이 소리의 ‘다양성’입니다. 사용한 DAC에 따른 성능차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소리의 성향차가 플레이어에 그대로 드러나기를 바랐습니다. 이전처럼 비슷한 소리에 정말 음질로 딱딱 떨어지는 체급 구분은 식상하잖아요.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SP1000의 소리적 완성도가 워낙 높기 때문에 단순히 가격만큼 성능이 떨어지는 기기로 만들어졌다면 구태여 사용기를 쓸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SE100은 SP1000과는 사뭇 다른 소리로 만들어졌습니다.


  레퍼런스적인 소리로는 SP1000이 단연 적절합니다. 평소 사용 중인 비전이어스의 VE6 이어폰과의 매칭에서는 SS보다 COPPER가 보다 잘 어울립니다. VE6에서는 SS의 날카로운 음선이 조금 부담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울림이 풍부한 COPPER쪽이 보다 음악적으로 곡을 표현한다고 느꼈습니다. SE100은 COPPER보다 더욱 소릿결이 부드럽습니다. 선예도 면에서 보자면 SS > COPPER >> SE100 정도로 나열이 가능할 듯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음선의 외곽 경계가 SS가 가장 또렷하고 SE100이 가장 부드럽습니다. 해당 특성은 저역의 타격감에서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 맺고 끊는 또렷함이 SE100은 덜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보다 도드라지는 차이점이 바로 음색입니다. SP1000을 기준으로 한다면 SE100이 한 톤 어둡습니다. 이는 여러 부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듯한데, 우선 SE100의 중역이 살짝 강조된 점을 들어야겠습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역의 양감이 중역에 비해 적은 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날카롭고 높게 치고 올라가야 할 파트에서 만족할 만큼 뻗어주지 못한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대신 모든 면에서 음선의 두께가 굵게 느껴지기 때문에 소리의 존재감은 뚜렷한 편입니다.


  SE100의 스테이징도 음색에 한몫을 합니다. SE100은 좌우 무대 폭이 SP1000에 비해 좁습니다. 그 만큼 개방감이 덜 느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한 것이 때로는 SE100의 스테이징이 보다 입체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SE100이 가지는 전후의 깊이감 덕분일 겁니다. 가뜩이나 선이 굵고 부드러운 소리가 양옆은 조금 가깝게 대신 전후를 크게 활용하면서 들려주니 전반적으로 진득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국 두 플레이어가 지향하는 방향 자체가 다르다는 게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대체로 첫인상에서 크게 바뀌는 경우가 거의 없듯이 SE100 역시 처음 들었을 때 받았던 느낌이 그대로 이어지더군요. SP1000이 현대 하이파이 오디오가 추구하는 모범적인 소리라고 한다면 SE100은 이전 시기 유행했던 소리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미세한 질감까지 그대로 살려서 듣는 쾌감을 쫓기보다는 굵직하고 존재감이 뚜렷하게 표현하는 스타일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보다 ‘남성적’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SE100 감상



  이제 SP1000과의 비교는 이 정도로 하고 SE100에만 초점을 맞춰서 몇 곡 들어본 감상을 끝으로 사용기 마치겠습니다. SE100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가 뭘까 생각해보니, 재즈 장르의 여성 보컬이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다이애나 크롤의 <Turn Up the Quiet> 앨범을 들어봤습니다. 이 앨범은 유명한 재즈 스탠다드 곡들을 재해석해서 녹음한 앨범인 만큼 익숙한 멜로디의 곡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연주의 비중보다 보컬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편인데 보컬을 강조하는 편인 SE100으로 들었을 때 다이애나 크롤의 낮은 톤의 허스키한 음색과 궁합이 좋습니다. 




  다음은 한스 짐머의 <Live in Prague>에 수록된 ‘Dark Knight Trilogy’를 틀었습니다. 이번에는 SE100의 단점이 드러납니다. 우선 평소 익숙한 무대 규모보다 좌우가 좁고 타악기의 타격감이 알맹이가 꽉찬 느낌이 덜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곡은 넓은 공간을 악기 소리로 가득 채우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가장 좋게 들렸는데 SE100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악기의 수가 많아질수록, 음역대 폭이 넓어질수록 SE100과 잘 어울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듯합니다. 반면 소편성 악기 구성이나 보컬 위주의 곡을 만났을 때는 SE100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앞서 다이애나 크롤의 앨범에서도 그랬고 영화 라라랜드 OST Score를 들었을 때에도 SE100만이 들려주는 매력적인 음색이 있습니다. 클래식보다는 재즈 장르에 잘 어울리는 편인데, 다만 클래식 장르 중 첼로 솔로만큼은 SE100으로 꼭 들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SE100이 가장 잘 소화해낼 수 있는 음역대의 악기 중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마치며



  만약 딱 하나의 기기로 모든 장르의 음악을 고루 만족스럽게 듣길 원한다면 SE100은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 역시 레퍼런스로 사용할 하나의 기기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SE100보다는 SP1000 (COPPERㅎㅎ)입니다. 그런데 이미 아스텔앤컨에 SP1000이라는 걸출한 기기가 중심을 잡은 상황에서 똑같은 성향의 기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을까요? 최신 기술로 무장한 하이엔드 오디오 시장에서 여전히 빈티지 오디오의 매력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SE100은 때로는 과도하게 분석적인 현대 사운드에 피곤함을 느끼는 분들에게 좋은 대안이 될 만한 기기 같습니다. 과거의 명반을 주로 들으시는 분들이라면!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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