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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아니면 차선, 차선아니면 차악이라도(호주Perth)

계획이 망가지지 않는 법(feat. 호주 Perth 로드트립)

by 일반토마토

계획대로 안 될 때가 참 많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집중해서 써보자'라는 계획은, 마치 키세스 초콜릿 껍질처럼 쪼그라들며 뭉개진다. 글을 쓰려고 키보드에 올린 두손에서 손가락을 벗어난 손톱들이 하필 눈에 걸린다. 채 한 줄이 채워지기도 전에 '집중해서 써보자'는 다짐은 혹여 살을 찝을까 집중해서 내 손톱을 자르는 것으로 순식간에 치환되었다.


J인 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한다. 계획과 함께라면 익숙한 우리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최적화된 경로로 가고자 하는 곳을 딱딱 찾아가는 그런 안정감이 든다. 하지만 계획대로 된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군대에서였다. 학생 때 내가 세운 계획들은 그것이 지켜지든 안 지켜지든 대부분 나에게 달려 있었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내게 달려 있는 약간의 우울감 같이 내가 손쓸 수 없는 불가항력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또 이 불가항력으로 인한 차질들은 내가 꿈꾸던 완벽한 휴가를 계속 방해했다. 하지만 어그러진 계획에서 또 다른 계획이 만들어지고, 계획과 다른 날 나가게 된 휴가는 지하철에서 고교 시절 짝사랑하던 친구를 만나 계획에 없던 술 한잔도 내게 따라주었다.


나의 첫 해외여행은 호주였다. 첫 직장에서 '밥벌이'에 대한 적잖은 환상이 깨져버린 시기에, 그냥 훌쩍 친구와 호주 서부 '퍼스(Perth)'라는 곳에 갔다. 사실 그때는 Australia(호주)와 Austria(오스트리아) 구분도 못 할 정도로 해외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친구가 보내준 예능 '꽃보다 청춘' 영상에서 로트네스트 아일랜드(Rottnest Island), 서호주의 쿼카가 사는 섬에서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스카이다이빙 영상을 보았다. 나는 그것이 자살행위처럼 보였다. '한번쯤은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행위를 실제로 해볼 수 있다니, 이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일’—나는 그때가 그 밀려 있던 숙제를 끝마치기에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외로 가는 첫 비행기는 말레이시아를 경유해 호주 퍼스에 새벽 1시쯤 도착했다. 첫 해외여행이라 공항에서 수하물을 기다리는 것조차 TV에서 보던 장면처럼 느껴져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재미가 지루함이라는 다리 저림으로 변해갈 즈음, 나의 짐이 내 깜빡이를 놓치고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호주의 겨울에 나는 얇은, 땀 배출이 잘되는 아디다스 기능성 티셔츠를 입고 공항을 떠났다. 덕분에 나는 다음 날 로트네스트 페리를 타는 항구 앞 작은 쇼핑센터에서 'I love Australia' 츄리닝 바지와, 가슴팍에 캥거루가 박힌 빨간색 후리스를 사게 되었고, 그 옷들 때문인지 첫여행의 설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도 나는 호주를 사랑하고있다.

IMG_6985.jpeg 퍼스에 도착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로 가는 날, 예약해둔 스카이다이빙이 기상 악화로 취소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차선으로 섬에서 비행기 대신 자전거를 타고, 로트네스트의 맑은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지금까지 내 SNS 프로필 사진으로 남아 있는 인생 사진, 쿼카 셀피(Quokka Selfie)도 찍을 수 있었다.

IMG_7098.jpeg 쿼카와 셀카

이미 계획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우리의 호주 여행은 이후에도 계획했던 피너클스 사막에서의 은하수 관찰이 날씨 문제로 실패할 듯했으나, 차선에 차선을 더한 또 다른 계획으로 은하수를 보기 위해 피너클스를 세 번 방문했고, 스카이다이빙을 위해 계획에 없던 세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예약 시간 2시간 전에 간신히 이륙 허가를 받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 전엔 이름조차 몰랐던 로킹엄(Rockingham)이라는 도시에서 마침내 어릴쩍 상상하곤 했던 그 일을 완수했다. 그리고 이 여행은 아직도 나의 최고의 여행이다.


IMG_E9130.JPG 록킹험 스카이다이빙


결국, 벌어진 일에 얽매여 있는 경우가 많다. 이미 내가 생각했던 계획은 알맹이가 빠진 껍질처럼 바스라져 버렸을 때, 그 껍질을 주머니 속에 넣고 손으로 계속 부스럭부스럭 비벼야 할지, 아니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그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을 찾을아야 될지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 차선이 아니면 차악이라도 행하는 것.

그것이 계획이 무너지지 않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IMG_8750.jpeg 호주 밤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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