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기록] 실용커피서적
브레빌 870이 집에 있다. 반자동 커피 머신이라 원두 분쇄도, 물의 온도, 원두의 양에 따라 커피 맛이 천차만별이다. 그걸 모른 채 한참 커피를 내리다 날카로운 신맛과 지옥 불구덩이에서 갓 올라온 쓴맛까지 다 맛보았다. ‘기분 나쁜 커피의 풍미’라는 센서리 클래스를 열 수 있을 정도랄까.
두어 달 전부터 커피 관련 책과 유튜브 영상을 뒤적거리다 브레빌 870 기본 구성품으로는 안되겠다 싶어 온라인으로 저울, 디스트리뷰터, 탬핑패드 등을 주섬주섬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날부터 커피 노트를 적어가며 여러 가지 변수에 따른 커피 맛을 기록하고 있다. 취향을 길러내는 작업은 만만한 게 아니다.
독서모임에 참여할 분을 모집하는 공고를 여러 매체에 올렸다. 아내가 적은 공고문을 손가락으로 쭉 내리며 읽다가 잠깐 손을 멈췄다. ‘커피에 진심인 남편이 직접 내리는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문구가 내 뒤통수를 따갑게 만든다. 아내와 엄마 이외의 사람에게 커피를 대접한 적 없는 난 어느새 타칭 커피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겸허하게 받아들이자고 속으로 되뇐다. 냉동실에 남아 있던 원두를 확인해 보니 핸즈커피 ‘핸즈에스프레소16’, 수안커피 ‘콜롬비아 후일라(디카페인)’이 전부다.
핸즈커피는 8월 말에 로스팅 한 원두라 신선도가 떨어졌고, 수안커피 디카페인 원두는 에스프레소 샷을 내리기에 애매한 양만 남아있었다. 결국 집 가까운 곳, 블랙업 커피에서 원두 하나를 업어왔다.
블랙업 커피의 ‘콜롬비아 싱글오리진’
이 원두가 독서모임 당일 문제를 일으켰다. 정확히 말하면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이 원두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원두 본연의 풍미를 최대한 살려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3번가량 원두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추출 작업이 필요하다. 근데 피곤하다는 이유로 새 원두로 에스프레소 추출 작업을 미뤘다.
독서모임 당일 아침,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아내와 새로 사 온 원두로 에스프레소 샷을 내렸다. 근데, 에스프레소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많은 양이 쏟아진다. 헉, 소리와 함께 과소추출의 결과인 끔찍한 신맛에 몸서리쳤다. 그렇게 추출 변수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3번의 추출을 했지만 모두 실패였다.
결국 추출 경험이 많았던 핸즈커피와 수안커피 원두를 적절히 사용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2잔을 독서모임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일면식도 없던 분들께 내가 만든 커피를 제공했을 때의 긴장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다행히 크레마가 풍부하고 적당한 산미가 있는 커피를 두 분 다 남김없이 드셨고, 맛있다고 이야기했다. 그제야 안도감이 나를 에워쌌다.
타인에게 내가 마련한 커피를 처음으로 제공했던 날,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준비성 부족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뻔했다. 타인에게 건넨 커피 한 잔의 값어치가 나에게는 쓰지만 값진 경험이 되었다.
* 22년11월5일 (독서모임 당일) 커피노트
- 새로 산 원두로 추출 테스트를 충분히 거치지 않고, 손님에게 막무가내로 커피를 건네는 행동은 상당한 실례다.
* 22년11월6일 (독서모임 다음날) 커피노트
- 문제의 원두, 블랙업 커피 ‘콜롬비아 오리진’ 추출 포인트를 찾아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련했다. 결과는 완벽했다. 커핑노트에 적힌 건자두, 건포도의 풍미를 충분히 끌어올려 주었다. 산미 있는 커피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 아내의 입맛에도 충분히 좋았다. 역시 원두가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야!
커피를 마시는 행위를 너머 최선의 커피를 마련하는 과정까지 나의 손님들에게 전하고 싶다.
조원진 작가님의 저서 ‘실용커피서적’을 도서관에서 꺼내 들었다. 우연히 만난 독자가 어쩌다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답했다. 그의 대답이 좋아, 나도 닮고 싶다는 마음에 소개한다.
내가 마신 커피의 역사와 함께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에게 커피는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사는 일은 바쁘고 녹록지 않지만, 힘든 순간에 함께 한 커피 한 잔은 언제나 온전하게 그 순간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커피를 둘러싼 수 많은 이야기와 기쁨을 생각하면, 한 잔의 값어치는 헤아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