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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Aug 22. 2023

트라이팟, 예민X

약 40일만에 다시 쓰는 글

마지막 글을 쓰고 한 달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머릿속으로 여러 문장이 맴돌았지만 도무지 손가락까지는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것이 장표도 업무일지도 아닌데 형식이며 완성도가 뭐 그리 중요하랴 싶었다. 정신차려, 넌 백수잖아!


그동안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떠올려봤다. 아마 게임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이 글의 제목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챘으리라.

로스트아크는 트라이포드 스튜디오가 개발하고 스마일게이트알피지가 운영하는 PC MMORPG로, 말도 안 되는 대기열과 '여러분이 남습니다' '빛강선' 등을 탄생시킨 갓겜...과 같은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난 아직도 서툰 모험가일 뿐이고, 그런 내게 로스트아크는 조금 특별한 게임이다. 솔직히 게임이 특별해서인지, 특별한 시기에 이 게임을 만나서 그리 느끼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난 글들이 밋밋해보여 좋아하는 캐릭터 이미지 한 장 넣었다. 2021년 6월, 공식 홈페이지의 인기투표 Top 100에서 5위를 차지했다. 그땐 몰라봐서 미안해.


자칭 '프로 이직러'인 내가 정말 굳게 마음을 먹고 이직한 였다.

애정을 쏟았던 나의 일을 완전히 버린 뒤 새출발하고 싶었다.

머리로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진득하게 남아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처럼, 나는 몇 번이나 마음 먹고도 나의 일을 깨끗이 씻어 내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때 직장 동료에게 추천받은 게임이 로스트아크다. 아마 그 동료가 여러 게임을 재미있게 즐기는 걸 보고 궁금해서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임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어떤 게임이든 진득하게 재미를 느낀 적이 없었다. 판 플레이하면서 맛을 알게 되면 금방 싫증이 났다. 또 어떤 건 너무 쉬워서, 어떤 건 너무 어려워서, 어떤 건 너무 잔인해서, 어떤 건 아트가 마음에 안 들어서 등등의 여러 이유로 흥미를 잃게 됐다.

그래서 전혀 모르고 지냈다. 게임이 이토록 훌륭한 그래픽, 말도 안 되게 탄탄하고 풍부한 서사, 클래식 뺨치는 OST, 섬세한 콘셉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걸.

나는 정신없이 게임에 빠져들어 갖가지 콘텐츠를 탐닉했고, 하루가 멀다하고 다른 캐릭터를 계속 만들면서 캐릭터가 저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를 맛봤다. 그리고 허둥지둥 빠져든 만큼 빠르게 흥미를 잃어갔다. 게임은 순전히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하면 할수록 공부할 거리와 숙제가 늘어났다. 나는 가뜩이나 게임에 서툴러 기본 조작법만 익히기도 벅찼다.


다시 로스트아크를 시작한 것이 이번 여름이다. 그 중간의 언젠가도 한 번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처음과 같은 감흥조차 느끼지 못해 금방 포기했다.

그런데 이번은 좀 다르다. 재미있다. 꾸준히 즐기고 있다. 여전히 잘 못해서 공부할 거리와 숙제가 많은데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때의 나는 게임을 잘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웃기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 당시에 '나는 게임도 못해'라는 말을 꽤나 자주 내뱉었던 기억이 난다. 짐작해보건대 내게 벅찼던 것은 익숙하지 않은 게임이 아니라, 학창시절부터 꿈꿔온 일에서 도망쳤다는 사실 아니었을까.    

재미없고 어려워서 접은 게임에 세 번씩이나 다시 도전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이 세상에 게임이 얼마나 많은데. 내게 로스트아크는 몇 번씩이나 주저앉고 좌절하던 그때를 종종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어떻게든 내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과업이 된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이렇게 달라졌다고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지도.


물론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다.

일단 직장생활을 하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얼마나 여유로운가. 그래서 온갖 퀘스트와 숙제가 날 덮쳐와도 캡슐커피 한 잔 내려 마시며 해치울 수 있다.

'못한다'는 말에 제법 너스레를 떨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아이쿠,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요' 내지는 '저런, 죄송합니다' 등으로. 최선을 다했다면 나 스스로를 옭아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살기 위해 하면서부터다.


트라이팟은 try + party를 뜻한다. 같은 보스를 잡으려는 유저끼리 모여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트라이한다. 누군가 잘못했다고 눈치주는 일도, 본인이 실수했다고 사과하는 일도 용납되지 않는 아름다운 모임이다. 그러니 예민한 사람은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자의 몫을 해내면서 클리어를 향해 달려간다.

나같은 초보 모험가는 트라이팟에 들어가는 일조차 도전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하던 예전에 비하면 참 많이 변했다. 성장했다거나 발전했다는 말을 쓰고 싶진 않다. 단지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즐기고, 계속 트라이를 이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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