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열다섯 번째 금요일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 추석이 지나갔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명절 문화도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에게 명절은 신고식과 비슷한 느낌이다.
"어느덧 N살이 된 000 인사드립니다. 저는 작년 입사한 00기업에서 건실하게 재직 중이며 내년도 무탈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교제 중인 친구와는 함께 장래를 그리고 있어 조만간 적당한 때에 인사드릴 예정입니다. 건강검진 결과는 이상 무, 살이 2kg 정도 쪘지만 곧 원상복구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안부가 때로 부담스럽고 불편한 시선으로 느껴진다는 걸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간 마냥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으니 괜히 제 발 저리는 것이다.
그렇게 좋은 소식만 전하고 안 좋은 이야기는 덮어두고 싶은 마음에 80% 정도만 솔직한 사람이 된다. 사실을 전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그래, 명절의 나는 거짓말쟁이다.
아직 아무에게도 퇴사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일을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그럴 계획이다.
손이며 발이며 온몸에 무채색 물감이 묻어있는 기분이었다.
우리네 명절은 오색찬란, 알록달록하고 따뜻한데 나 홀로 준비가 서툴렀다.
조금이라도 손을 뻗으면 그 모든 풍경을 망칠까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혹 무채색이어도 그 자체로 빛나거나 다른 색과 조화를 잘 이뤄내는 사람도 있던데. 나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다.
모두가 잘 준비를 하고 세상이 나처럼 어두워진 밤.
뒤늦게 보름달을 찾는 내게 엄마는 친히 베란다의 방충망까지 열어주었다(우리 집은 대대로 벌레를 싫어한다. 아아, 벌레 침입의 위험까지 무릅쓰는 엄마의 사랑). 안개가 가득해 달이 보이지 않자 나는 우스갯소리로 "에이 올해는 망했네!"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엄마는 나의 방으로 찾아왔다. 망했다는 소리 하지 말고, 친구가 보내 준 보름달 사진이라도 보라며 엄마의 휴대폰을 내게 건넸다.
참 잘 찍힌 사진이었다. 비교적 최신 기종인 내 휴대폰도 달을 찍으면 빛 번짐이 심하던데 이건 무슨 모델일까? 잔인하리만치 둥근 달이 선명히 찍힌 사진이었다.
엄마의 휴대폰을 들고 있는 나는, 그 마음 앞에서 더더욱 무지개색이어야만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