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

밀알지다를 정의하는 법

by 에디터 Rii


투명한 용기. 엷은 레몬 빛깔 샤워젤이 택배로 왔다.

드디어, 드디어. 비로소 좋아하는 샤워젤로 씻을 수 있게 됐다.

이 택배를 기다리는 동안 비누 거품으로 샤워하는 일이 얼마나 고역이던지 설명하기도 싫다.

손에서 미끄덩거리던 비누의 지랄맞음 하며 특유의 케케묵은 냄새도 싫고 사용하고 나면 비누거품이 뚝뚝 떨어지는 불쾌함까지!

손바닥만 한 녀석은 그 밀도만큼 유쾌하지 않았다.


임시방편으로 쓰던 비누를 버렸다. 택배 기다리는 동안 사용했던 터라 새것과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밀알진 얼굴을 띄던 엘리제가 뱉은 비속어는 그 비누가 낸 거품보다 풍성했을 게다.

결단코, 용기는 투명해야 했다. 그녀의 몸에 칠해질 샤워젤이 얼마큼 맑은지 판단해야 했으니.

또 엘리제는 그 속에 담긴 액체가 맑을수록 환호했다. 향기도 좋아야 하며 뽀득함도 적당해야 했다.

디스펜서 저항력은 세게 힘주지 않아도 기분 좋게 눌려야 하고 샤워를 자주 해도 불안하지 않도록 대용량이어야 했다.

단순하게는 제품 이름도 촌스럽지 않아야 했고 어느 정도 기능성을 갖추어야 했다.

이 모든 조건을 지독하게 맞춘 제품이 있다는 것에 그녀는 스스로도 놀랄 뿐이다.

열에 한 명은 그녀의 향수 제품을 묻는다. 샤워젤만 쓴다는 대답은 대부분 믿지 않았다.

향수는커녕 몸에 로션도 바르지 않았다.

맑은 도화지가 물감의 배경이 되듯이 엘리제의 몸은 향기를 도드라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대답은 믿거나 말거나가 되기 일쑤였다.


평범할 것도 없던 날들이 지나고 엘리제는 돌연 '샤워젤을 몽땅 사야겠어' 생각했다.

다짐과 함께 60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을 몽땅 샤워젤 사는 것에 썼다.

한꺼번에 배송하기 어려우니 분할 배송하겠다는 판매자의 연락을 받았다.

엘리제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애달프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막연하게 '샤워젤을 몽땅 사야겠어'하는 생각은 멈출 기세 없이 엘리제를 몰아붙였다.


드디어, 비로소, 마침내. 마침내 전부 도착했다.

먼지 묻은 택배 박스를 정리하고 거대하게 감겨있는 에어캡을 잘라내고 샤워젤을 집 안에 들여놓는다.

먼지 묻은 택배 박스를 정리하고, 거대하게 감겨있는 에어캡을 잘라내고, 샤워젤을 집 안에 들여놓았다.

먼지 묻은 택배 박스를 정리하고.. 거대하게 감겨있는 에어캡을 잘라내고.. 샤워젤을 집 안에 들여놓고..

먼지묻은택배박스를정리하기.

거대하게감겨있는에어캡을잘라내기.

샤워젤을집안에들여놓기.

정리하고 잘라내고 들여놓기.

정리하고 잘라내고 들여놓기.


현관 앞에 잔뜩, 샤워젤들을 보며 엘리제는 묘한 기시감에 빠졌다.

언젠가 이 많은 액체들이 자신을 익사시키는 꿈을 꿨던 것만 같다.

소파를 감싸고 있던 거대한 담요를 가져와 바닥에 넓게 깐 뒤 그것들을 싣고 욕실까지 끌고 갔다.

엘리제는, 어떤 악마 같은 샤워젤 유령에게 홀렸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많은 샤워젤을 욕조에 쏟아붓는 괴상한 짓은 않을 테니 말이다.


엘리제는 그곳에서 반신욕을 했다.

30분.

50분.

2시간.

시간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차츰 깨달았다.

몸은 잠수하길 원했다. 잠수를 하는 것이야말로 해갈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엘리제는 앉은 상태로 엉덩이를 쭉 미끄러뜨린 뒤 머리를 완전히 담갔다.

10초.

30초.

2분.

언제까지고 향기로운 액체와 호흡할 수 있었다.

엘리제는 기포가 올라가지 않을 때까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간 샤워젤을 응시했다.

죽어서도 향그럽도록.





*밀알지다 : 얼굴의 생김새가 빤빤하다.